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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을 찾았다. 이곳 광주에서 가자면 꼬박 천릿길이다. 아침 먹고 출발해 자정 무렵에 돌아와서 자동차 계기판을 보니 왕복 740km가 찍혔다. 홀로 운전해 오간 먼 길이지만, 힘들기는커녕 약간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연휴 첫날이어선지 도로는 상하행선을 막론하고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수도권의 사통팔달 거미줄처럼 뚫린 고속도로도 무용지물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도로마다 온통 빨간색이었다. 출발한 지 6시간 반,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서야 간신히 닿았다.

지난달 타계한 홍세화 선생을 뵈러 가는 중이다. 3년 전 봄꽃이 만개하던 이맘때쯤에도 백기완 선생과 노회찬 전 의원을 뵙기 위해 부러 길을 나섰다. 의지가 나약해지고 마음이 심란해질 때, 내겐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모란공원만 한 '치료제'는 없다.

이소선, 백기완, 김용균... 홍세화 선생 뵈러갔다가 만난 이름들
 
'흰 머리의 척탄병' 홍세화 선생의 묘소
 '흰 머리의 척탄병' 홍세화 선생의 묘소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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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고 신록은 푸르렀으나 묘역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썰렁했다. 제초 작업을 하는 관리인 몇 분을 제외하곤 인기척이 없었다. 화사한 봄날 같지 않게 고즈넉했고, 묘역을 통째로 독차지한 느낌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 소리만이 고요함을 깨웠다.

홍세화 선생의 묘소는 민주열사 묘역 맨 윗자리다. 입구에서 '민주열사 추모비'를 지나 오르면 맨 위 오른편으로 난 길 끝자락에 있다. 서울 올림픽으로 떠들썩했던 1988년, 고작 열다섯 살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숨진 문송면군의 묘소를 길 초입의 이정표로 삼으면 된다.

가다 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보인다. 유신 독재정권의 종지부를 찍었던 YH 무역 사건 당시 스물한 살 나이로 희생된 김경숙 열사와 지난해 노동절에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정책에 저항하며 분신한 양회동 열사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그들을 위한 '척탄병'을 자처했던 홍세화 선생이 외롭지 않을 듯하다.

그곳에 서면 묘역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왼쪽 너머에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와 그의 부친 박정기 선생이 잠들어 있고, 아래로는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님, 백기완 선생과 김용균 열사 등의 묘소가 보인다. 그곳이 부채꼴 모양 묘역의 한가운데다.

천릿길을 왔는데, 홍세화 선생만 뵙고 갈 수는 없다. 열사들의 무덤마다 큰절을 올리지는 못한다 해도, 묘비와 안내판을 찬찬히 읽으며 그들의 숭고한 삶을 기릴 수는 있다. 웬만한 축구장 한 개 크기도 못 되는 아담한 곳이지만, 다 돌아보려면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린다.

이번엔 민주열사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장기려 박사의 묘소도 알현할 참이다. 6.25 전쟁 중 월남해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와 공공의료 체계 구축에 이바지한 분으로, 행려병자 등 가난한 이웃을 위해 평생 인술을 실천한 참의사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외람되이 느껴진다고 말할 정도다.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가 수개월째 계속되다 보니, 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얼마 전엔 아프리카 남수단의 오지 톤즈의 빛이 된 이태석 신부의 묘소에도 다녀왔다. 장기려 박사의 스승 이름을 딴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가톨릭 사제가 돼 의료 활동을 해오다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다. 참의사가 귀한 시대에 그나마 그분들이 계셔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북녘이 고향인 장기려 박사는 전쟁 통에 가족과 생이별한 뒤 평생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이름 앞엔 이곳에 모셔진 이들처럼 민주열사라는 호칭은 없지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묘역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고 있다. 후배 의사들이 부러 찾아와 인술을 펼치는 참의사가 되겠노라 다짐할 만한 곳이다.

장기려 박사의 묘소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길가에 손바닥만 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지만, 나무에 가려져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민주열사 묘역에서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5분 남짓 걸어 오르다 보면, 길 왼편으로 흡사 절의 사리탑 모양의 큼지막한 '혼골탑(魂骨塔)'이 보인다. 그곳에서 왼편으로 나란히 5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홍세화 선생 묘소 가는 길 입구에는 고작 열다섯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숨진 문송면군이 잠들어 있다.
 홍세화 선생 묘소 가는 길 입구에는 고작 열다섯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숨진 문송면군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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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열사 묘역의 중앙에는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님, 백기완 선생과 김용균 노동자의 묘소가 마치 이웃사촌처럼 오손도손 모여 있다.
 민주열사 묘역의 중앙에는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님, 백기완 선생과 김용균 노동자의 묘소가 마치 이웃사촌처럼 오손도손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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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의 묘소. 민주열사 묘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따로 모셔져 있다.
 장기려 박사의 묘소. 민주열사 묘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따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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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동자·친일 인사 박영효의 묘소

이곳 모란공원은 광주의 국립 5.18 민주묘지와 이천의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양산의 솥발산 공원과 함께 대표적인 민주열사 묘역으로 손꼽히지만, '옥에 티'도 있다. 장기려 박사의 묘소에 가는 도중 태극기를 새겨놓은 생뚱맞은 표지석 하나를 만난다. 갑신정변의 주동자 박영효의 묘소 가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표지석에는 '1882년 태극기 제작'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놓았다.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이 창안한 뒤, 같은 해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가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게 통설이다. 여전히 이설이 분분한 내용을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양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박영효가 누구인가. 설령 태극기 제작이 온전히 그의 공이라고 해도, 그의 노골적인 반민족적 친일 행각을 떠올린다면 하잘것없는 치적일 뿐이다. 철종의 사위로 문명 개화론을 주장했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뒤 평생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 매국노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후 친일적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뒤로는 철저히 일본 편에 섰다. 일왕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봉행하는 신궁봉경회의 총재를 맡았고,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초로 일본 제국회의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임명됐을 만큼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살다 간 조선인'이었다.
 
장기려 박사 묘소를 찾아 오르는 길가에 박영효 묘소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새겨진 태극기가 생뚱맞다. 사진 오른쪽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그 끝에 있다.
 장기려 박사 묘소를 찾아 오르는 길가에 박영효 묘소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새겨진 태극기가 생뚱맞다. 사진 오른쪽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그 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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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가 민주열사 묘역을 발아래에 둔 곳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것도 태극기를 걸어두고 마치 애국지사인 양 행세하는 모습이 황당했다. 그의 유해가 부산에서 이곳으로 이장된 때가 1966년이라고 하니,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힌 때보다 몇 해 앞선다. 실제 모란공원은 박영효의 후손이 처음으로 조성한 사설 묘지로 알려져 있다.

1966년이면 박정희 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강행한 이듬해다. 최고 권력자가 친일파였으니, '친일'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개화파의 일원 정도로만 인식된 인물이었다.

표지석의 화살표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좌우에 번듯한 봉분이 여럿 있다. 크기나 위치로 봐서는 모두 박영효의 무덤만 같다. 실제 박영효의 묘소는 언뜻 가엾으리만큼 초라하다. 근래 찾는 이 아무도 없는 듯 먼지만 수북하고 묘소를 에워싼 나무엔 거미줄만 무성했다.

이곳이 박영효의 묘라는 걸 알려주는 건, '태극기 최초 제작'이라는 업적을 상기시키듯 똑같이 적어놓은 묘비다. 묘비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한참을 헤맸을 뻔했다. 유해를 덮은 대리석 위에는 이곳에 그의 부인인 철종의 딸 영혜옹주가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을 적어놓았다.
 
박영효와 영혜옹주의 합장묘. 묘비에도 '태극기 최초 제작'이라는 업적을 박아놓았다. 유해를 덮은 석판 위에는 그의 벼슬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박영효와 영혜옹주의 합장묘. 묘비에도 '태극기 최초 제작'이라는 업적을 박아놓았다. 유해를 덮은 석판 위에는 그의 벼슬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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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나란히 적혀있는 그의 벼슬에 자꾸만 눈이 갔다. 인적이 아예 끊긴 적막한 분위기와 포개져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상보국숭록대부판돈녕부사(上輔國崇祿大夫判敦寧府事)'라는 박영효의 휘황찬란한 벼슬이 마치 그의 친일 매국 행위를 감추려는 수작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그의 묘가 이장됐을 당시엔 이곳이 모란공원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에 대놓고 손가락질하기 힘들었던 시절, 이곳을 부러 찾아와 그를 알현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테다. 그나마 그의 후손들은 족보에서 지워지고 묘소조차 알 수 없는 매국노 이완용보다는 나은 신세라고 위안 삼을지도 모르겠다.

묘역을 돌아 나오려니 주차장 옆에 조그만 묘비 하나가 눈에 띈다. 지난 2018년 이명박 정부 당시 강제 추방된 뒤 심장마비로 숨진 네팔 노동자 미노드 목탄(우리말 이름 미누)이 사진과 함께 새겨져 있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을 기리는 추모비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네팔에 있지만, 그의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그의 묘비 바로 옆엔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대표하는 '오월 걸상'이 놓여 있다. 5.18의 정신과 미누가 몸소 실천한 이타적 삶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묘역 입구에 이 둘을 나란히 배치한 건, 마치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인권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네팔 노동자 미누를 추모하는 묘비가 '오월 걸상'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야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갈 수 있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네팔 노동자 미누를 추모하는 묘비가 '오월 걸상'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야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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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마석모란공원, #홍세화, #장기려, #박영효, #미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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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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