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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황토현과 우금치 모두 고개다. 峴(현)과 峙(치)의 차이를 구분할 재주는 없으나 '넘어야 할' 대상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둘은 달랐다. 대승을 거둔 곳에선 혁명이 본격화하였고, 끝내 넘지 못한 곳에서 혁명은 패퇴하고 말았다.

두 곳 모두의 기념탑이 독재자 손으로 세워지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황토현 기념탑이 세워진 게 1963년, 우금치 위령탑이 1973년이다. 총칼로 나라를 도둑질한 쿠데타 세력이 부족한 정통성을 동학혁명에서 찾으려 한, 엉뚱한 발상이 빚은 웃지 못할 촌극이다.

혁명군의 원뜻과는 전혀 다른 탑 글귀들
 
1963년 세워진 황토현 기념탑. 탑신에는 '除暴救民 保國安民(제폭구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동학혁명군이 내세운 글귀는 '輔國安民(보국안민)'이다
▲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1963년 세워진 황토현 기념탑. 탑신에는 '除暴救民 保國安民(제폭구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동학혁명군이 내세운 글귀는 '輔國安民(보국안민)'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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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유 때문인지, 황토현 기념탑에는 동학혁명군이 외친 뜻과는 전혀 다른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잘못된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輔國(보국)이 아닌, 나라를 보위한다는 保國(보국)이다. 동학혁명군이 마치 고종을 보위하려 봉기했다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힐 여지를 남겨 두었다.

1983년 황토현 전적지에 기념관이 들어선다. 이를 만든 자 역시 총 맞아 죽은 전임 독재자의 사생아다. 그때 함께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과 그에 딸린 부조(浮彫)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전봉준은 유약한 서생으로, 부조는 포동포동 살 오른 농민군이 마치 소풍 가는 듯한 행렬의 모습이었다.
 
1983년 세운 황토현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유약한 선비 모습의 전봉준 장군은 명패마저 '전봉준 선생'으로, 농민군은 포동포동 살이 올라 유람 가는 형상이었다.
▲ 전봉준 장군 옛 동상과 부조(浮彫) 1983년 세운 황토현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유약한 선비 모습의 전봉준 장군은 명패마저 '전봉준 선생'으로, 농민군은 포동포동 살이 올라 유람 가는 형상이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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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성금 등을 합해, 황토현 전적지에 다시 세운 상징물. '불멸, 바람길'이란 이름을 갖게 된, 혁명에 나선 군중을 형상화한 人(인) 모양이다.
▲ 불멸, 바람길 국민 성금 등을 합해, 황토현 전적지에 다시 세운 상징물. '불멸, 바람길'이란 이름을 갖게 된, 혁명에 나선 군중을 형상화한 人(인) 모양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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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친일 행적을 보인 조각가의 작품으로, 이후 수많은 비판과 구설이 오갔다. 2021년에서야 옛 동상이 철거된다. 아울러 전국에서 모은 성금 2억3천여만 원을 포함한 13억8천여만 원 사업비로 혁명에 나선 군중을 형상화한 人(인) 모양의 '불멸, 바람길'이란 이름을 가진 작품이 2022년 들어선다. 동상 하나 바꾸는 데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5월 11일(양)은 법정 국가기념일이다. 황토현에서 혁명군이 관군에게 승리를 거둔 1894년 4월 7일(음)의 양력 날짜다. 법정 국가기념일인 만큼 동학혁명의 주요 사건들을 선정, 국민이 참여한 투표로 날짜를 결정했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는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학혁명의 상징으로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을 기념일 지정이 보여주었다.

매복과 기습 통한 승리...  2천4백 정규군이 대패한 사연

황토현 전투는 혁명군이 몇 가지 요소를 치밀하게 활용해 일궈낸 승리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한 작전은 '매복과 기습'이었다.

열악한 화력의 혁명군으로선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컴컴한 어둠과 익숙한 지리를 십분 활용한 임기응변도 주효했다. 무엇보다 추레하게 도망치는 모습으로 관군을 유인, 자만에 빠뜨렸다.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를 나타낸 박홍규 화백의 그림.
▲ 황토현 전투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를 나타낸 박홍규 화백의 그림.
ⓒ 이영천(대뫼마을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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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과 혁명군 중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에는 의견이 갈린다. 감영병과 보부상으로 나뉜 관군에, 무장(茂長) 보부상으로 위장 잠입한 혁명군이 관군 선봉으로 나서 공격을 유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가장 어두운 새벽, 적게는 1천7백이고 많게는 2천4백 명의 정규군이 그야말로 몰살당한다.
 
관군으로 가장한 무장 보부상 군이 선발대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중략)… 자욱한 안개까지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약속한 개전 시간에 이르러 위장한 보부상 군사들이 선발대가 되었다. 선발대는 …(중략)… 중봉을 향해가며 한줄기 총소리를 내뿜는다. 이때 동학군 진영에서도 따라서 응사해 온다. 선발대는 연이어 총을 쏘며 동학군 진을 쳐들어간다. 선발대의 뒤를 따른 관군은 가소롭다고 여기며 평지를 내달리듯 쫓아 들어간다. 선발대가 가는 대로 의심 없이 막 뒤덮어 들어가며 중봉 허리를 지나 꼭대기까지 거침없이 들어섰다.

동학군 진지는 이미 비워진 뒤라, 모두 다 도망쳤다는 생각에 (관군 측은) 함부로 덤벼들었다. 이럴 즈음에 그 산 동서북 삼면에 매복해 있던 동학군들이 일시에 에워싸며 관군의 뒤를 짓쳐 들었다. 이겼다고 안심하던 관군은 졸지에 낭패를 당하여 꼼짝하지 못하고 궤멸하였고 약간 도망한 군사들은 또 복병을 만나 몰살당했다. 그 복병은 어제 백산에서 부안으로 나누어 간 동학군 부대로 그 밤으로 돌아와 그 산 전후좌우 요소요소에 몇천 명씩 매복해 있었다. 궤멸하여 흩어지던 관군은 거의 다 죽어버리고 살아 돌아간 자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13~213 의역 인용)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사기는 하늘을 찌른다. 양총을 전리품으로 얻어 화력을 보강한 혁명군의 위세는 높기만 하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이 몰려든다.

그렇더라도 나라를 구할 사람으로 전봉준이 지목된 건 좀 특이해 보인다. 백성의 손에 무기를 들려 봉기를 주도했기 때문일까, 전라도 향군이라지만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로 승리였기 때문일까?
 
고부민란이 아주 달라져 전라도 전체를 장악한 대부대로 커지고, 점점 조선 전체로 확대할 조짐을 보였다. 그것은 황토현 싸움에서 관병이 대패한 후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풍문과 소문이 더욱더 커졌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고 떠들어댔다. (앞의 책. p214 의역 인용)
 
1894년 4월 7일(음) 전라 감영군을 상대로 몰살에 가까운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적지.
▲ 황토현 전적지 1894년 4월 7일(음) 전라 감영군을 상대로 몰살에 가까운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적지.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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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혁명군은 4월 7일 정읍으로 이동하여 관아를 점령, 죄수를 방면하고 무기고를 접수했다. 8일 흥덕으로, 9일에는 고창을 거쳐 무장으로 이동한다. 가는 곳마다 창의소를 차려 고을의 폐해를 정돈한다.

사적인 보복과 살상을 금하고 치안 회복으로 여러 고을을 안돈 시키며, 당장은 군수품과 무기를 보완한다. 무장 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여시메'에서 3일을 주둔하며 홍계훈의 움직임을 탐지한다.

무신 홍계훈의 수상한 움직임

홍계훈(洪啓薰)이란 인물을 어찌 보아야 할까? 임오군란 때 왕후 민씨를 도운 공으로 높은 관직에 오른 무신이다. 왕후에겐 충신이었는지 모르겠으되, 분명 기회주의자였음이 그의 여러 행적이 증명하고 있다.

홍계훈의 정부군이 7일 군산에 도착한다. 정작 그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초토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리 유쾌한 기분도 아니다. 옥구 임피에서 숙영하는 동안, 8백 군사 중 절반 가량이 탈영해 버린다. 황토현에서 관군이 몰살당했다는 소문에 지레 겁먹은 탓이다. 조정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전주성으로 진군한다. 월등한 화력에 많은 군수품을 싣고서다.
 
복원된 전라감영 선화당. 전라감사의 집무실이다.
▲ 전라감영 선화당 복원된 전라감영 선화당. 전라감사의 집무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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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에서 관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대경실색하여 감영 병정 일천 명과 보부상 수천 명이 동학군에게 몰살당한 사유를 적어 정부에 보고하였다 …(중략)… 홍계훈이 장위영 병정 일천 명을 거느리고 인천항으로부터 군함 한 척을 타고 군산에 내려 전주성으로 들어가 감사 김문현과 무슨 의논을 한 후, 감영의 잔병과 세를 합하여 바로 고부 백산을 향하여 출발하니 그때 영솔장은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 오원영 등이요.

일천 정부군은 일제히 신식 서양총을 가졌으며 기타 수십 문의 대포를 선두로 내세우고 서양 북과 나팔 소리에 의기양양하게 나아가니 군대의 위용이 당당하고 위엄은 늠름하여 시골 백성들 눈에는 과연 외국 수출품의 살인 기계를 바라보고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앞의 책. p214~215 의역 인용)
 
홍계훈은 당장 토벌에 나서리라던 기대와 달리 며칠을 전주에서 뭉그댄다. 대신 감사와 술판을 벌이며, 전라감영의 무장 김시풍을 험담하기 바쁘다. 그가 내려온 1차 목적이 김시풍 제거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이다.

무장 김시풍은 화적을 토벌한 공로로 널리 이름이 떨쳤고 병법에도 능하고 담력도 좋았다. 무엇보다 군사를 능란하게 지휘할 줄 알았다. 초토사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으나, 왕후 민씨의 수족이 아닌 흥선대원군 사람이라는 점에서 배척되었다.

혁명군도 김시풍이 훨씬 더 두려운 상대였다. 밀명이라도 받은 듯, 홍계훈은 전주에 오자마자 트집을 잡아 김시풍을 주살해 버린다.
 
전주성의 상징 정문인 남쪽 문으로 '풍남문'이라 부른다. 이 문 앞에 효수된 김시풍 목이 걸려 있었다. 1982년 복원되었다.
▲ 풍남문 전주성의 상징 정문인 남쪽 문으로 '풍남문'이라 부른다. 이 문 앞에 효수된 김시풍 목이 걸려 있었다. 1982년 복원되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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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감영의 영장을 지냈던 김시풍(金始豊)을 법에 따라 처단하였고 …(중략)… 풍남문 밖에 목을 내걸어 대중에게 경계로 삼았다. 시풍은 원래 전주 사람으로 …(중략)… 공적을 쌓아 영장이 되었고 중영(中營)에 세 번, 전영(前營)에 두 번이나 임명되어 적들도 두려워하였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p83)
 
지원군을 요구한 홍계훈은 요지부동이다. 4백 지원군이 영광 법성포에 당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엉덩이를 뗀다. 4월 18일이다. 혁명군이 두렵기만 한, 왕이 임명한 관군의 기회주의적 지휘관의 행보다.

그 사이 혁명군은 부대별로 나뉘어 곳곳을 휩쓸고 다닌다. 주력이 영광과 함평, 나주를 거치며 군사와 무기를 모아나간다. 과정에서 군자금과 군수품, 군량미를 더했음은 물론이다. 사발통문에 내건 목표를 향한 밑바닥이 차근차근 다져지고 있었다.

태그:#황토현전투, #동학농민혁명기념일, #갑오동학혁명기념탑, #輔國安民, #김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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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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