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완도신문

관련사진보기


약을 구해 널리 이롭게 한다는 섬 전남 조약도(助藥島)

이곳은 약성을 가진 흑염소가 유명한 땅이다. 온 산의 모든 풀이 약이 된다는 이곳의 동쪽에 당숲으로 유명한 당목(堂木)마을이 있다. 이곳은 근대이전까지 멀리 고흥(高興)과 금당도(金塘島) 인근의 평일도(平日島, 금일읍), 생일도(生日島)를 연결하는 해양교통의 요충지였고 그때는 항포(港浦) 또는 당목개 혹은 당항리(堂港里)로 불리웠다. 지금도 당목항은 완도군 동부지역의 도서를 오가는 여객선박들의 쉼터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당목마을은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 밀양 박씨(密陽 朴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평산 신씨(平山 申氏)가 강진에서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당목마을에는 당숲공원이 있다. 당숲공원에는 마을이 형성될 때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는 수십그루의 소나무, 팽나무, 귀목나무, 생달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나무들이 태풍에 고사되거나 고목이 되었고 귀목나무만이 하늘을 찌르듯 자라고 있다. 사실 귀목나무는 늘씬한 모습보다는 둥치가 우람한 것이 특징인데 이곳의 귀목나무 수십그루는 소나무처럼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당집과 교회
 
ⓒ 완도신문

관련사진보기


일반적으로 당제를 모시는 바닷가 마을의 당숲은 매우 신령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누구나 출입을 쉽게 하는 곳이 아닌데 당목마을 당숲은 숲을 가로질러 자동차도로가 개통되고 하루에도 수백대의 차량이 통과하여 신령스러움은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당집만큼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숲속에는 당목마을 당집이 깨끗하게 보전되고 있다. 원래 이 당집은 초가집에 죽담(자연석을 흙과 함께 쌓은 담)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나 50여년전 이 마을 출신인 재일교포 김길남(金吉南)의 도움으로 새로 신축했다. 당목마을 주민들은 이 당집을 매우 신성시하고 정월 초 엿새날 당제를 모시는데 신체는 '당알'이라고 부르는 원석(圓石)이다. 

이 당알은 입도조들이 마을 앞 하천을 정비하다 괭이에 받쳐 상처를 입은 돌인데 이상하게 상처를 입은 곳에서 사람처럼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돌을 신령스럽게 여겨 숲속에 당집을 짓고 당알을 조심스럽게 모셔 당제를 모셨는데, 입도조 중 한분인 신씨 할아버지의 꿈에 당 할머니가 나타나 ″그래 나를 잘 모셔주어 고맙다, 나는 이제 제주도로 간다″하고 선몽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마을에서는 사고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당숲에는 당집말고도 아주 특별한 건물이 두 동 있다. 하나는 '숲속다방'건물이다. 숲속다방은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약산 동부지역 주민들의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해 왔다. 그래서 한때는 어촌지역 주민들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지금은 다방이 문을 닫았지만 외벽에는 아직도 숲속다방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한때 번성했던 숲속 이야기를 전한다.

또 하나는 대한성결교 해동교회다. 당집과 교회는 어떻게 보면 극과 극인데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상생하며 잘 지내고 있다. 사실 이 교회가 여기에 터를 잡을 때 마을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어찌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상여도 당집 피해가...
 
ⓒ 완도신문

관련사진보기


당목마을 토박이 권원동(76. 당목마을 노인회장/사진)씨가 당숲을 설명했다.

"원래 이 당숲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어우러져 아주 숲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숲이었어요. 그란디 사라호 태풍 때 상당히 많은 나무가 소실됐어요. 내가 그때 초등학교 1학년 이었는디 마을에서 난리가 났어요, 기억은 가물가물하는데 아무튼 숲이 우리집 옆이어서 어른들이 마을에 난리가 났다고 한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할아부지에게 들은 애기로는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당숲의 귀목나무가 뒤틀림 없이 수고(樹高)도 높고 하니까 여러개를 베어갔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에 쓰였는지는 모르는데 꼭 당숲 나무를 공출하라고 하니까 태평양전쟁기간이라 안하면 핍박을 받기 때문에 당시에는 당숲을 훼손하는 것은 마을의 안녕을 담보로 하는 것인데 그래도 주민들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공출했다고 들었어요.

이 당숲은 내가 초등학교 댕길때까지 굉장히 신령스러운 곳이었는데 학교를 갈려면 당숲 옆을 빙 돌아서 다녀야 했는데 우리아부지가 학교에 갈때먼 당숲에다 절대로 오줌을 누면 안 된다고 신신 당부를 해요, 당숲에다 오줌을 누면 꼬추가 이상하게 된다면서요. 손가락질도 못하게 하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당숲에 대해서는 금기시하는 것이 무지 많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상을 당하면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는데 반드시 당집을 피해서 나갔어요, 그때는 상여가 당집앞을 지나면 상여채가 부러진다고 해서 멀리 돌아서 상여가 나갔고, 당숲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주어다 땔감으로 쓰면 그 집이 꼭 불이 난다고 해서 나뭇가지도 자연 그대로 놔두고요."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내가 1972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새마을운동이 막 들불처럼 일어났어요. 우리 마을에도 새마을운동이 시작됐고 1973년 당숲을 가로질러 오늘날의 길이 뚫렸어요.

그때 마을의 어른들과 젊은이들 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갈등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당숲을 파괴하고 길을 뚫을 경우 당할머니가 노하셔서 마을이 큰 재앙을 입을 것이라고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새마을운동 때 행정에서 미신타파를 하라고 적극 권장해서 결국은 어른들이 양보하여 도로가 뚫리게 되고 차가 자유롭게 다니게 됐어요."           
         

오늘날 당숲은 두 개로 갈라져 유지되고 있지만 정월 초 엿새에 모시는 당제때는 왼새끼를 길게 꼬아 당집주변에 두르고, 나머지 새끼로 길로 갈라진 숲과 숲을 연결하여 하나의 숲으로 보고 재를 모신다. 또한 당숲공원에는 팔각정 1동과 다양한 운동기구등이 비치되어 주민들이 건강을 챙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평상과 원탁이 갖춰져서 여름철이면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도 큰 각광을 받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완도, #당숲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완도신문은 1990년 9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참 언론을 갈망하는 군민들의 뜻을 모아 창간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사훈을 창간정신으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길을 걷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