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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재 안부 (임실 신덕면 내량마을에서 조망)
 곰재 안부 (임실 신덕면 내량마을에서 조망)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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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지역 최초의 향토읍지인 350년 전의 운수지(雲水誌, 1675년) 원본이 이 지역의 향토역사탐구가인 김진영(임실군 오수면 동후리)씨에 의해 2023년에 발견됐다. 지역 향토사 연구에 새 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다(관련 기사: 350여년 전 주민 생활상 적힌 사료집 발견, 일반에 첫 공개 https://omn.kr/25yak).

김진영씨는 전체의 글자 수가 4만 8천 자 정도되는 운수지 서책을 수없이 탐독하면서 산천과 자연을 서술한 이 지역의 지명을 찾아 계속 답사하며 확인해 왔다. 

그는 운수지(1675년)에 신덕면에 '웅치(熊峙, 곰재')라는 고개 이름이 나오는데 현재 신덕면에 '웅치'라는 지명은 없으므로, 웅치를 찾아 신덕면의 여러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단다.

운수지(1675년)의 웅치 서술 내용

熊峙 在縣西五十五里 (웅치 재현서오십오리)
新德面 梁鉢里 西北 接完山界 (신덕면 양발리 서북 접완산계)
自大火來峙 爲完任踰越之嶺 (자대화래치 위완임유월지령)

웅치는 (운수)현의 서쪽 22km 거리에 위치한다.
신덕면 양발리 서북으로 완산과 경계를 맞댄다.
대화치로부터 이어져 온 고개이며 완산과 임실은 넘나드는 고개가 된다.

 
곰재 마루 흘러가는 호남정맥 오봉산 줄기
 곰재 마루 흘러가는 호남정맥 오봉산 줄기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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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는 분명 봄날인데 때로는 한여름 같은 날씨이고, 산록에는 연두색 나뭇잎이 어느새 부쩍 돋아나 있는 4월 중순. 김진영씨의 안내를 받으며 웅치 고개를 찾아 탐방하였다. 그는 호남정맥의 임실 치마산(馳馬山, 568.1)과 완주 오봉산(五峰山, 513m) 사이에 있는 박죽이산(520m) 왼쪽 고개인 소금바위재(鹽巖峙, 염암재, 310m)가 웅치(곰재)로 추정된다고 했다. 

임실 신덕면 내량마을에서 1km쯤 농로와 임도를 따라 웅치로 추정되는 소금바위재에 이르니 고갯마루에 서낭당 돌탑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고개에서 건너편으로 서쪽으로 내려가면 완주 구이면 계곡리 염암마을에 이르는데, 고개를 내려가는 중간에 소금바위(염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바위에서 소금바위재라는 고개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고갯마루에서 염암마을로 내려가는 고갯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구태여 험한 수풀을 헤치고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위험한 일이었다.
 
곰재 고갯마루 서낭당 돌탑 흔적
 곰재 고갯마루 서낭당 돌탑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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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면 외량마을에서 박죽이산의 옆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2차선 도로를 달려서, 소금바위가 있는 구이 계곡리 염암마을을 찾아갔다. 시대가 변하여 문경새재도 장성갈재도 본래 길의 목적을 잃고 관광자원으로 변하는 현실이다. 지금은 잊힌 소금바위재 고갯길도 옛날에는 어엿하게 전라감영이나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전국으로 뻗은 10대 간선도로망이 있었다. 한양에서 호남 지역으로 방향을 잡은 도로망은 삼남대로와 통영별로였다. 삼남대로는 영산기맥의 안부인 장설 갈재를 넘어 목포로 이어지고 제주까지 갈 수 있었다. 통영별로는 호남정맥인 슬치를 넘어 남원을 거쳐 수군통제영의 거점인 통영으로 이어졌다.

이 통영별로가 남원에서 갈라져 여수까지 큰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호남 지역의 순창, 화순, 고흥 등에서는 삼남대로나 통영별로를 활용하기에 어중간한 위치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한양이나 전라감영을 오갈 때 사잇길로 소금바위재를 넘는 길이 유용했다. 

염암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500m쯤 올라가니 집채만큼 커다란 소금바위(염암)가 나타났다. 조선 시대에 이 소금바위 아래와 염암마을에 염암점(鹽巖店)이 있어서, 고개를 넘는 나그네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머물러 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주민인 이상문(완주 구이면 계곡리)씨가 소금바위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 낳기를 바라는 여성들이 이 소금바위에 와서 기도하면 영험하여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 먼 길을 가는 남성 나그네들도 이 바위에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나그네 잠들어 소리 못 들었네"
 
염암 (완주 구이면 계곡리 소금바위재 어귀)
 염암 (완주 구이면 계곡리 소금바위재 어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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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씨는 소금바위 주변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관리하면서 이 지역의 전통문화를 지켜가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세이던 1779년(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재직 시기)에 화순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면서 이 고갯길을 넘었단다. 그는 소금바위 부근의 객점에서 머물며 오언율시인 '행차염암(行次鹽巖)'을 읊었는데, 당시 고갯길의 정경이 생생히 느껴진다.

峽裏鹽巖店 (협리염암점) 산골짜기 안에 염암점이 있는데
村扉傍水齊 (촌비방수제) 마을의 사립문이 물가에 나란하네.
酒漿開小市 (주장개소시) 술과 국밥을 파는 작은 저자가 열렸고
書畵似幽棲 (서화사유서) 글씨와 그림이 그윽하게 담겨 있는 것 같네.
石翠濃堪挹 (석취농감읍) (계곡의) 돌이 비취색으로 진해서 손으로 잡기 적당하고
溪流嬾欲提 (계류란욕제) 시냇물이 천천히 흘러 손을 담그고 싶네.
客牀眠得穩 (객상면득온) 나그네는 침상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到曉不聞鷄 (도효부문계) 새벽이 되었는데 닭 우는 소리 못 들었네.


이상문씨는 이곳 소금바위 길목에 다산의 '행차염암' 시비라도 세워지고, 소금바위재를 넘는 고갯길이 복원되어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어려있는 옛길을 체험하며 소중한 향토 인문학적 자산으로 활용되기를 바랐다. 그는 소금바위 주변에서 토사에 파묻혀가는 길이 3m 정도의 곰과 거북이 모양의 기이한 바위를 두 개 발굴하여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소금바위가 있는 이 지역을 곰독골(곰돌골), 곰덕골, 곰바위골로도 부르는 향토 지명이 현재까지 전해 온다.

김진영씨가 말하길, 그가 3월 하순에 임실 신덕면 내량마을을 답사했을 때 지역 주민인 박종호(임실 신덕면 양발리)씨가 소금바위재를 일컬어 곰재(곰치)라고 말했단다. 이 고개의 옛 이름인 곰재가 구전으로 살아 있었다는 걸 확인했단다. 소금바위가 원래는 곰바위(곰 형상 또는 신령스러운 바위)였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소금(鹽, 염)'의 고어는 '소곰'이다. 조선 시대 중기까지 '곰바위'로 불리던 이 고갯길의 바위가, 소금 결정이 쌓인 모양의 바위 형태라든지, 또는 조선 시대 후기 짭짤한 이윤이 가능했던 소금 장수들이 이곳에 자주 머물러서였든지 등 이유로 바위 이름이 소곰바위로 바뀐 것으로 추정해 본다. 

몇 년 전에 박죽이산과 곰재 지하로 계곡터널을 뚫어 임실 신덕면과 완주 구이면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였다. 곰재는 호남정맥을 넘어 전라감영과 한양으로 천 리 길을 열면서 고갯마루 서쪽 어귀에는 곰바위가 명물이고 나그네들이 묶어가는 염암객점이 있었고, 고개 동쪽 양발리 천변에는 양발장이 열렸다. 즉 곰재는 이 고개를 넘어 오가는 물산이 상호 오갔던 삶의 터전이었다. 

지역 향토읍지인 운수지(1675년)의 웅치(熊峙, 곰재)는 우리말 고개 이름 '곰재'를 한자어 '웅치'로 기록한 것임을 확인하는 한편, 곰재 옛 고개를 생생하게 되살려 그려보는 소중한 탐방 여행이었다.
 
소금바위재 안부(완주 구이면 계곡리 밖소금바위 앞에서 조망)
 소금바위재 안부(완주 구이면 계곡리 밖소금바위 앞에서 조망)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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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덕면소금바위재, #구이면계곡리소금바위, #행차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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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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