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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 시티 갤러리
▲ 쿠알라룸푸르 시티 갤러리 쿠알라룸푸르 시티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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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룸푸르 시티 갤러리는 메르데카 광장 바로 옆에 있다. 갤러리 밖에는 유명한 'I LOVE KL' 조형물이 있다. 비 오는 날이었는데도, 유명한 조형물이라 그런지 사진 한 컷을 얻기 위해 제법 긴 줄을 서야 했다. 조형물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간이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조형물 위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보인다.

시티 갤러리 내부에는 쿠알라룸푸르 도시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9세기 우리 역사에서 서양을 빼고 이야기하기 곤란하듯 쿠알라룸푸르의 과거 역시 마찬가지다. 지배자뿐 아니라 함께 살 이웃까지 바뀌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말레이시아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현재 국왕이 9개 주의 왕들 중 하나로 결정되는 이유다. 그 나라들 중 가장 강력했던 국가가 '말라카'다. 말라카(멀라까 혹은 믈라카라고도 번역되고, 영어로도 Melaca 혹은 Malacca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는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오가는 상선들의 중계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번영했다.

말레이시아의 과거, 말라카의 번영과 성장
 
말레이시아 박물관에 전시된 말라카 전성기의 지도(박물관에서 촬영).
▲ 말라카 지도 말레이시아 박물관에 전시된 말라카 전성기의 지도(박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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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 말라카와 포르투갈의 전쟁 당시 왕이자 술탄인 마흐무드는 가족들을 데리고 달아난다. 왕이 나라를 버리고 탈출했기 때문에 말라카 왕국의 중심지였던 현재의 '말라카 주'에는 왕이 없다. 말라카 주는 주지사 선거를 하는 4개 주 중 하나다.

마흐무드의 가족은 말레이 반도 아래쪽에 자리를 잡는다. 그 마흐무드 왕의 아들 알라우딘 리아야 샤가 말레이 반도 끝, 지금의 조호르 지방에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조호르 왕국이다.

조호르 왕국은 16-17세기 포르투갈령 말라카와 말라카 해협을 두고 경쟁을 벌일 정도로 성장한다. 왕조의 성립 배경이 이렇다 보니 조호르 왕국의 지배자들에게는 포르투갈을 향한 적개심과 말라카를 탈환하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조호르 왕국은 몇 번이고 말라카 탈환을 위해 전쟁을 벌인다. 죽음을 앞둔 왕이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포르투갈만은 안 돼. 말라카를, 말라카를 꼭……'이라고 유언을 전하는 장면과 같은 상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마침내 1641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연합해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조호르 왕국의 땅이 되지는 못했다.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말라카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를 교수대로 보낸 그 혁명은 멀고 먼 말레이시아까지 영향을 준다. 유럽의 하늘을 날던 나비 한 마리가 무심코 한 날갯짓이 엄청난 파급력으로 말레이시아를 덮친 격이다.

프랑스혁명이 성공한 이후 놀란 인근(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 같은 나라들) 국가들이 연합하여 프랑스 공화국 정부에 전쟁을 선포한다. 대부분의 전투는 프랑스 동부와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곳에서 벌어졌다. 유럽이 좁긴 좁다.

1795년 프랑스 공화군을 피해 네덜란드 총독이던 빌럼 5세가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국의 보호에 기대야 했던 빌럼 5세는 당시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해외 식민지를 영국에 내놓는다. 그 식민지 중에 말라카가 포함되어 있었다.

말레이 반도, 영국의 통치
 
지붕은 말레이식 건축 양식인 영국 성공회 성당
▲ 세인트 메리 성공회 교회 지붕은 말레이식 건축 양식인 영국 성공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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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라카의 통치자는 영국이 되었다. 말라카에 살고 있는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싶었겠지만, 역사는 이렇게 흘러갔다. 10년쯤 지속됐던 프랑스혁명전쟁이 끝난 후 네덜란드로 돌아간 총독의 아들은 왕(빌럼 1세)이 된다. 아버지가 영국에 내놓았던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181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협정을 맺고, 1816년 빌럼 5세에게 양도받았던 모든 식민지를 고스란히 네덜란드에 돌려주었다.

유럽의 왕들이 이리저리 얽힌 결혼으로 다들 사돈의 팔촌 정도로는 관계가 있어 이런 협정들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당장 '날벼락'이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상인들이었다. 그때까지 약20년 동안 자유롭게 말라카를 드나들며 무역업을 하던 영국의 상인들이 졸지에 네덜란드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입장이 됐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한 영국은 급한대로 새로운 항구를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조호르 왕국을 압박해 1819년 싱가포르에 영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항구를 확보한다. 네덜란드는 발끈했다. 말라카 해협의 위치는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이었다.

1819년부터 1823년까지, 영국과 네덜란드는 전쟁을 벌이는 대신 길고 긴 외교적 교섭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싱가포르에 무관세 자유 무역과 자유 이민 정책을 실시한다. 싱가포르에 돈이 돌기 시작하자 대대적인 이민 행렬이 이어진다.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협정을 맺는 데 성공한다. 말라카를 포함한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를 영국이, 그 아래쪽은 네덜란드가 점령한다는 조약이었다. 이제 말레이 반도는 영국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말레이 반도 전부를 접수한 영국은 이제 그곳에서 생산되는 주석 광산에 눈을 돌린다. 다시 한번 나비의 날갯짓이 시작된다. 이번 나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날아오른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이 발발하면서 무기류에 사용되는 주석의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레이 반도의 주석광산은 땅을 소유한 술탄과 운영하는 영국 자본가, 일하는 중국 출신의 노동자라는 삼박자에 맞춰 굴러가기 시작한다. 주석광산의 개발이 늘어나면서 유입되는 중국 노동자의 숫자도 증가한다.

주석과 함께 수출 주력 상품이 된 것이 고무였다. 고무나무 플랜테이션을 시작한 영국의 자본가들은 농장 노동자로 인도인들을 데려왔다. 지금 말레이시아 인구를 이루는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이라는 구성이 시작된 것이 대략 이 시기이다.
 
싱가포르의 명물인 카야토스트를 말레이시아에서도 맛볼 수 있다. 한때 같은 나라였으니까.
▲ 카야 토스트 싱가포르의 명물인 카야토스트를 말레이시아에서도 맛볼 수 있다. 한때 같은 나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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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갤러리를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광장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건너면 1894년에 문을 연 '세인트 메리 대성당'이 있다. 영국의 지배하에 설립된 교회이니 당연히 성공회 소속이다. 이슬람 국가로 알려진 말레이시아에는 이렇듯 모스크도 성당도 힌두교 사원도 존재한다.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일을 일으킨 근본적인 힘은 말레이시아 밖에서 왔다.

힘은 폭풍과 같다. 강할 때도 약해질 때도 있다. 때로는 몰아칠 때도 물러날 때도 있다. 거대한 폭풍이 불어왔다 사라진 뒤, 남은 잔해를 수습할 사람들은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쿠알라룸푸르에 살고 있던 말레이인들은 폭풍이 지나간 뒤 바로 옆에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이 남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중국인과 인도인들을 그곳에 던져 놓고 간 폭풍은 사라졌지만 결과는 남아있다. 폭풍을 원망하며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말레이인들과 남겨진 중국인, 인도인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https://brunch.co.kr/@zian/333)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태그:#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동남아여행, #여행, #카야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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