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비바람, 태풍 이겨낸 '이곳'... 완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고마을 부치숲, 마을의 전설도

등록 2024.05.10 10:46수정 2024.05.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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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저술된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에서 살기 좋은 땅 열 곳(十勝之地)을 나열하였는데 이런 곳을 길지(吉地)라 하였다. 비록 정감록에는 안 들어있지만 예로부터 해상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해 살기 좋은 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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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신지면 동고마을이다.

동고마을은 오늘날 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어촌마을에서는 규모가 아주 큰 마을이다. 연안 차씨(延安 車氏)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족보에 의하면 주민들이 대규모로 터전을 잡고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779년 경으로 약 250여년전이다.   


동고마을에는 이때 방풍(防風)과 방사(坊沙)를 위해 마을 앞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곰솔(海松) 숲이 있다. 동고마을 사람들은 이 숲을 '부치'라고 부른다. 어원의 연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부치'는 동고마을의 방풍림이자 어부림(漁夫林)으로 또 여름철 휴양림으로 우리지역의 훌륭한 경관자원이다.

이 '부치' 숲은 마을 입구부터 해안을 따라 수령 100 ~ 250여년 이상의 곰솔 300여 그루가 폭 100~30m, 길이 300m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무들은 숲의 폭이 넓어졌다 좁아지며 지금은 폐교된 동고초등학교와 마을을 따라 바닷가로 길게 이어졌다. 

소나무의 줄기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고산준령의 소나무들은 통직성(通直性)을 띤 반면 바닷가 소나무는 대체로 구부러졌다. 이러한 소나무 줄기의 특성 중 하나가 수피(樹皮)의 형태인데 예로부터 좋은 소나무는 줄기의 수피형태가 '용의 비늘이나 거북이 등처럼 수피가 두껍고 윤곽이 뚜렷한 수피 줄기를 가진 나무'를 좋은 소나무라 하였다. 

앞바다에 나타난 마귀할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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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동고마을의  '부치' 숲 나무들은 바닷가에서 외로이 서서 모진 비바람과 태풍을 이겨낸 세월의 풍상을 이야기하듯 마을에서 전해오는 여러 가지의 전설을 간직하며 뒤틀리고 구부러졌지만 위에서 말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 한그루 한그루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름답고 생육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문화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뛰어남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받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숲은 남지나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숲 바로 앞 백사장에서 사계절 휘날리는 모래를 막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 여름철이면 태풍에 비말(飛沫)되는 바닷물을 막아주어 농작물을 보호하고 주민들이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동고 마을은 마을이 큰 만큼 바다도 넓고 갖가지 전설도 많은 곳이다, 동고마을 앞에는 몇 개의 무인도가 있는데 첫째는 마귀할멈과 구무 섬(穴島) 전설이다.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해 고금도 덕동에 진을 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돕기 위해 동고마을 앞바다에 마귀할멈이 나타났다. 

마귀할멈은 충무공을 돕는 조방장(助防將)이었는데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덕동해안(德洞海岸)의 조류(潮流)를 막기 위해 남해의 바다 한가운데서 섬 하나를 밧줄에 꿰어 끌고 왔다. 그러나 물살이 너무 센 나머지 섬을 덕동 앞바다까지 끌고 가지 못하고 그만 동고리 앞바다에 놓아버렸다, 마귀할멈이 놓아버린 그 섬이 동고마을 앞 바다의 무인도 구무섬으로 오늘날은 바다 낚시터로 유명하다. 

또 하나는 구무 섬(穴島) 전설이다. 혈도는 말 그대로 커다란 해식동굴이 있는 섬인데 예로부터 아기를 갖지 못한 아녀자가 설을 맞이하여 금날 저녁에 아무도 모르게 머리에 대바구니를 쓰고 혈도를 향해 두 번 절하고 기도를 올리면 임신을 하였다는 전설이다. 

마지막은 마을 동쪽에 우뚝 솟은 기선봉 전설이다. 기선봉(141m. 旗仙峰)은 1597년 고금도에 진을 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기선봉의 꼭대기에 수군을 주둔시켜 기(旗)를 꼽고서 왜적을 감시했다고 한다, 정상에는 당시에 봉화를 피웠던 흔적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동고마을  '부치' 숲은 동고마을 어린이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는데 1963년 신지동초등학교 동고분교가 개교하였다. 그 후 어린이들이 늘어나면서 1965년 동고초등학교가 되었는데 이때 『부치』 숲 일부를 베어내고 운동장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부치' 숲이 학교를 감싸고 있어 초등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였는데, 특히 방풍림이 바닷바람을 막아주어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었다고 한다.

"'부치' 숲은 효자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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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김권채(77. 신지면 동고리/사진)씨가 말했다.

″우리 동네 '부치' 숲은 우리 동네를 살린 효자 숲이여, 내가 애릴 때 조부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디 일제 강점기 때 송진(松津) 공출이 어찌게나 심했는지 죽을 맛이었데, 그란디 '부치' 숲에서 송진을 채취해서 동네 사람들이 쪼금은 편했다고 하듬마, 나무가 크고 우람해서 송진이 다른 곳 보다 채취하기도 쉽고 많이 나왔다고 하드라고. 

우리가 애릴때는 지금 학교운동장이 잔디밭이었어. 잔디밭 앞으로는 '부치' 숲이고 그때는 학교가 없을 땐디, 그란디 우리 마을이 겁나게 크잔애 그랑께 여름철이면 마을 청년들이 거기서 모테, 그래갔고 반별로 체육대회를 해, 잔디밭이 평평해서 달리기, 배구, 축구경기를 하기에 그라고 좋았어.″

학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학교 터가 개인 소유의 밭이었는데 말 그대로 문전옥답(門前沃畓)이었어, 그 이유는 마을 앞 '부치' 숲이 바닷바람을 막아주니 밭농사가 아주 잘되는 좋은 땅이었는디 애기들 교육을 시킨당께 땅을 기부체납(寄附採納)해서 학교를 지었어.

또 오늘날은  '부치' 숲이 정비가 잘 되어서 아주 아름다운데 우리가 애릴때는 '부치'숲이 마을의 외진 곳이었어, 그래서 거기에 초분(草墳)을 많이 만들었어, 우리들한테는 징하게 무서운 곳이었당께, 그때는 도로가 오늘날과 같지 않고 차도 없어서 사람들이 외부로 나갈 때는 농로를 이용해서 다녔는디, 그라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초분이 사라져불고, 그라고 숲을 살린 채 바닷가 공유수면을 매립해서 도로를 개설하고 오늘날 차가 다니는 도로가 만들어졌어.″


우리 완도에는 일출과 일몰 사진을 촬영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여러곳인데 동고마을 '부치' 숲도 그중에 하나이다. 겨울철 남해안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붉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솟아오르는데 다도해에 점점이 박혀있는 섬과 섬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해를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찾는 명소 중 하나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 #부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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