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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배우러 갔다가 인생을 그려 봅니다

드로잉 표현법을 익히며 새롭게 계획해 보는 인생 후반

등록 2023.04.10 13:40수정 2023.04.1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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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편집자말]
벚꽃 비가 내리더니 이제 온통 연둣빛이다. 연두색 잎들은 주먹을 쥐고 있는 아가 손 같이 조그맣지만, 그 싱그러움은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밝고 환한 봄과 함께 새 학기가 찾아왔다. 학기가 시작되면 매일 집을 나서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이제 배우기 시작한 어른도 새로운 경험을 위해 여느 때와 달리 설렌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오랫동안 가르치던 사람이었던 나는 이제부터 배우는 학생이 되기로 했다. 코로나19로 어쩔 수 없이 주춤했던 도서관 문화 강좌가 일제히 개강해서 수강생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봄을 위해 작년 겨울 끝자락부터 많고 많은 강의를 들여다보며 '무엇을 배울까?' 즐겁게 고민했다.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표현법

예전에는 가진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적성에 잘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하하). 그러나 요즘은 창의적인 일, 창작하는 일이 훨씬 재밌다. 그래서 작년에 줌으로 들은 글쓰기와 결이 비슷한 강좌를 먼저 고르고, 반전으로 완전히 다른 강좌를 하나 더 골랐다.

누군가가 '배워볼래?'라고 해도 '글쎄, 보는 건 좋은데... 혹시 기회가 되면 다음엔 배우지 뭐'라고 했을, 걸어서 40분 정도면 도착하는 도서관의 드로잉 강좌였다. '그래, 이거야.' 올 봄 가장 기대가 큰 나만의 프로젝트. 글쓰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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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할 준비를 하며 105g 드로잉북, 4B연필, 콘테, 지우개 가루를 치우는 솔, 지우개, 면봉과 키친 타올로 그림 그릴 준비를 마친다. ⓒ 박정선

 
글을 쓰면 내 안의 생각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잘 정돈해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관련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며 글로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익혔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글을 쓸까'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 보면 멍해지는 순간이 꼭 찾아왔다. 그럴 땐 으레 미술관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글쓰기 전부터 좋아했던 그림 보기를 할 때가 온 것이다. 만 보 정도를 걸으며 멍 때리는 순간을 즐기면 도착하는 부산시립미술관.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전시회를 둘러보며 그날의 화가는 자신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보고 느낀다.

어떤 날은 전시는 보지도 않고 바로 2층으로 간다. 그곳에는 나만 알고 싶을 만큼 '애정 하는' 미술관 자료실이 있기 때문이다. 햇빛 쏟아지는 넓은 창, 사람도 거의 없는 큰 테이블 앞에 앉아 잠깐 쉬고 나면, 그 다음은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집을 골라 보며 감탄하는 시간이다.


'아,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던 유영국 화백의 삶은 이랬구나.' 책장을 넘기는 손길은 느릿느릿하지만, 환한 빛을 받아 갈색이 된 내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인다.

그런 날은 돌아와 책상 위 스탠드부터 켠다. 환한 불빛 아래, 키보드 위에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 건반 위를 날아다니 듯한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의 그림을 보는 것도 좋지만, 직접 그리면서 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드로잉 표현법으로 그리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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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대되는 준비물 오일파스텔 생긴 것은 크레파스와 비슷하지만 무르고 기름진 성질을 갖는 오일파스텔 ⓒ 박정선

 
처음 보는 준비물을 가득 챙기고, 그리면서 마실 향 좋은 커피까지 텀블러에 담아 도서관으로 갔다. 초보자를 위한 설명을 잠깐 듣고 곧바로 실전에 돌입. 어색하게 잡은 4B연필로 그려야 하는 것은 들판 풍경이었다.

선생님 시범을 따라 밑그림을 그린 후 음영과 원근감을 넣어준다. 빛은 어느 쪽에서 오는지, 멀고 가까운 풍경을 눈으로 보는 것과 비슷하게 표현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지 생각해야 했다.

그림을 그려보니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 짜임새를 잘 잡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림이 이상하다. 그러면서도 하늘의 구름, 그 아래 서 있는 나무들의 행렬은 뭉그리고, 그 밑에 누운 풀들은 손에 힘을 빼서 연하게, 나와 점점 가까워지는 부분의 풀밭은 이파리 하나하나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진하게 그려야 했다.

'어쩌면 인생도 그렇게 그려야 하지 않을까. 어릴 때는 전공에 따라, 그 나이에 배웠던 것, 어쩌다 관심 가졌던 것이 직업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100세 시대를 사는 요즘, 중간에 한 번쯤 다시 인생을 설계해야 할 때는 전체와 부분을 잘 생각해서 계획을 세워야겠지.

20대엔 큰 그림 없이, 멋모르고, 저돌적으로 시작했다면 40,50대에는 앞으로의 인생 전체 구도를 잘 잡고 연필로 쓱쓱 크게 스케치한 뒤, 그 안에는 자세하게, 있어야 할 자리에 섬세하게, 여태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연륜으로 애정을 담아,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해 작은 부분들을 그려나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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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긋는 연습과 들판 풍경 우선 연필로 여러 가지 선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실전에 들어간다. ⓒ 박정선

바쁘게 손을 움직이다보니 어느덧 그림이 완성되었다. 아직은 선생님 그림을 흉내 내는 수준이지만 손날 부분은 여느 화가 못지않게 시꺼멓다. 언제 그랬는지 소매 끝부분에도 접힌 모양대로 검댕이 묻어 있다. '다음 시간에는 토시를 챙겨와야지' 생각하며 도구들을 정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드로잉 표현법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인생 청사진까지 그려보았다. 새로운 경험과 배움은 언제나 우리를 성장시킨다. 나에겐 그래서 올봄이 더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아직 완연한 초록 잎으로 성장하진 못했지만 내 안에선 조그만 연두 잎들이 계속 춤추고 있다. 새로운 나를 표현해 가듯,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을 알기에 두근두근한다. 이 순간 만나는 새로운 내 모습이, 무척 반갑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드로잉 #전체구도 #음영표현 #원근감 #인생청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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