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먼지'처럼 보이는 아이들... 어떻게 해야 하나

[너희가 중2를 아느냐 ⑩] 아이들은 존재 그 자체로 푸르다

등록 2014.04.30 10:12수정 2014.04.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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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가명)는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을 때가 많다. 그런 형수 모습을 학기 초에 보고는 책상 잠 경력이 꽤나 되겠다 싶었다. 고개를 깊이 파묻고 자는 모습이 여유롭고 한가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형수는 내가 다가가 등을 몇 번 토닥거리면 벌떡 일어난다. 그러고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얀 치아가 온통 드러나는 크고 환한 미소다. 나는 형수의 그 넉살 좋은 미소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있다가 또 막무가내로 엎드려 자는 형수를 보면 고개를 절레절래 내젓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형수는 몇몇 선생님에게 '찍혀' 있는 상태다. "형수 그놈, 한 방 하는 녀석이에요, 조심해야 해"라며 조곤조곤 말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정 선생이니까 특별히 말해주는 거요' 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1학년 때 친구와 싸움을 해서 제대로 걸린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수는 내게 한 번도 그 '한 방'을 보여준 적이 없다. 오며 가며 봐도 친구와 특별히 심하게 장난을 치거나 친구를 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를 보면 새하얀 치아가 온통 드러나는 예의 환한 미소를 지은 채 허리를 90도로 꺾은 인사를 한다. 내게 일부러 찾아와 악수를 청하는 형수는 성격 좋고 넉살 많은 순둥이일 뿐이다.

얼마 전이었다. 형수가 다른 친구와 함께 학교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 종례를 마친 2학년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형수야, 뭐하고 있어? 집에 안 가?"
"네, 선생님, 친구 기다리고 있어요."
"친구? 누구?"
"명근(가명)이요. 방과후 수업 끝나면 함께 가려고요."
"이제 수업 시작한 것 같은데 힘들지 않겠어?"

형수는 괜찮다고 말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친구를 기다리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형수는 '한 방'은커녕 '반 방'도 없는 녀석이다. 설령 '한 방'이 있으면 어떤가. 이 세상에 자기 나름의 '한 방' 없는 사람은 없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1960~1989)의 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마지막 연이다. 기형도의 시를 좋아한다. 그의 전집을 사서 꼼꼼이, 틈틈이 읽곤 했다. 그런데도 왜 이 멋진 구절을 보지 못했을까.

나는,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손수 지은 축하 시를 지어주는 것으로 유명한 안준철(순천 효산고) 선생님을 통해 이 시구를 만났다. 얼마 전 군산에서 열린 한 연수 자리에서였다. 안 선생님은 연수 첫날 강사로 초청되었다. 안 선생님은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시선을 위 구절을 통해 멋지게 설명해 주셨다.

안 선생님에 따르면, 학교에는 학생들을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먼지로 보는 교사가 있다. 학생이라면 전자에 해당하는 교사가 좋을 것이다. 교사는 어떨까. 안 선생님은, 학생을 푸른 종이로 보면 푸른 종이와 사는 것이고, 학생을 먼지로 보면 먼지투성이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교육적으로 어떤 게 더 좋을까.

문득 주 선생님(가명)이 떠오른다. 주 선생님은 무언가 특별하다. 담임을 맡아도 아이들의 전년도 담임들과 되도록 말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대개 교사들은 일부러라도 전년도 담임들을 찾아다닌다. 학생부와 같은 공식 자료로는 볼 수 없는 아이들의 '뒤'를 캐기 위함이다.

이른바 '문제아'가 학급에 들어 있으면 더욱 노골적이다. 녀석들의 뒤를 수소문하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전년도 담임뿐만 아니라 교과 담당 교사들 이야기도 두루 듣는다. '문제아'들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법을 알아둠으로써 미리 품을 덜어 두자는 나름의 합리적인(?) 계산에서다.

"난 전년도 담임이 아이들 이야기하려고 하면 먼저 자리를 피해 버려요."
"그래요? 아이들을 더 잘 알려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얘길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렇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바라보는 일이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주 선생님과 차를 마시며 나누며 나눈 짤막한 대화였다. 주 선생님의 관점은 확고해 보였다. 분명 일리가 있다. 부모들도 잘 모르는 게 커가는 자식 속이다. 일 년 간 학급에서 만난 아이를 담임이나 교과 교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형수가 '한 방 하는 녀석'이라며 내게 은근히 조언해 준 그 선생님인들 형수를 낱낱이 알고 그런 말을 했을까.

부모든 교사든 모두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들어온 정보들로 아이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내게는 '푸른 종이'로 보이는 아이가 다른 이에게는 '먼지'로 다가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 아이는 원래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많은 교사와 부모가 그 무의미해 보이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논쟁을 벌인다.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게 우리 인간이다. 그 자명한 진리를 망각한 채 아이가 '푸른 종이'니 '먼지'니 하는 문제를 놓고 스스로 실랑이를 벌이는 교사와 부모가 천지다.

솔직히 처음에는 수빈(가명)이가 '먼지'처럼 보였다. 그 생각은 수업을 몇 시간 하면서 점점 굳어지는 듯했다. 수빈이는 내 말을 거의 한 귀로 흘려들었다. 수빈이에게 모둠 활동 시간은 친구와 대놓고 장난하거나 잡담하는 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온화한 눈길과 차분한 목소리로 나무라도 수빈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너는 말해라. 나는 내 할 일 한다'는 식이었다. 수빈이를 '푸른 종이'로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수빈이를 '먼지'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그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럴 수 없었다. 4월 초였던가. 수빈이가 다른 아이들 몇과 함께 교무실에서 벌을 서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로 갔다. 미리 손에 쥔 조그만 포장 초콜릿을 아이들 주머니에 살며시 넣어 주었다.

"이따가 먹어."

속삭이는 말에 수빈이와 아이들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전이었다. 그 전날 수업 시간에 한참 늦게 들어온 수빈이가 사과를 하러 왔다. 평소라면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 전에 나는 수빈이 담임 선생님에게 부탁을 해 두었다. 수빈이더러 내게 찾아가 사과 말씀을 드리라고 얘기해 달라고 말이다. 수빈이는 담임이든 누구든 누가 불러도 곧장 잘 오지 않았다. 수빈이 담임에게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수빈이가 찾아오리란 기대를 별로 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데 수빈이가 찾아온 것이다. 그때의 수빈이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차갑도록 굳은 표정을 짓던 '먼지' 같은 아이가 아니었다. 수빈이의 얼굴은 온통 밝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 미소를 띤 '푸른 종이'였다.

"수빈아, 선생님께 사과하러 온 거야?"
"네.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수업 시간 잘 지킬 거야?"
"네."

나는 수빈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가서 수업 준비하라는 내 말에 수빈이는 인사를 꾸벅 하고 돌아섰다. 여전히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근처에 앉아 있던 수빈이 담임에게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수빈이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게 얼마나 예뻐요. 지금까지 두 달간 본 모습 중에서 제일 예쁜 것 같아요. 그렇지요?"

수빈이 담임 선생님이 크게 미소를 지으셨다. 교무실 문을 빠져나가는 수빈이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안 선생님의 말처럼, 학생을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는 푸른 종이 위에 쌓인 먼지를 없애주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지가 제거되면서 푸른색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아이의 성장과 내적 성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을 먼지로 보면 교사는 먼지투성이 속에서 살게 되므로 늘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안 선생님은 그 과정에서 감정노동을 하는 교사의 감정이 치유되지 않고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교사와 아이들의 불화와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단순하고 순진한 소리로 들릴 법하다. 아이들을 '푸른 종이'로 볼 것인지, 아니면 '먼지'로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다. 애시당초 '먼지'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막무가내의 아이들, 도대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늘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들을 보고도 한가하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어떤 아이가 '먼지'로 태어났다고 하자. 그게 아이 잘못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생성에 그 어떤 개입도 하지 못한 채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내면에 '푸른 종이'가 분명 있지만 자라면서 형편 없는 '먼지'가 된 아이는 어떨까. '먼지'가 된 그 과정과 결과를 100퍼센트 아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아이들은 푸른 종이다. 먼지가 덕지덕지 앉은 회색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그 안을 잘 들여다 보면 빛나는 푸른색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그 푸른색을 끄집어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중2 #'푸른 종이' #'먼지' #안준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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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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