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조가비라고 꿈 한 보시기 담으면 안 될까?

[포토에세이] 이른 아침, 대천해수욕장을 느리게 걸으며

등록 2009.04.07 20:59수정 2009.04.0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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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홍안을 머금고 해변에 깔린 물빛 위로 내려앉는다. ⓒ 김학현

아침 해가 홍안을 머금고 해변에 깔린 물빛 위로 내려앉는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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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의 언저리에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헝클어져 사위어간다. ⓒ 김학현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의 언저리에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헝클어져 사위어간다. ⓒ 김학현
 

대천해수욕장의 아침을 밟다니, 그건 여유로운 마음이 주는 선물이다. 아침 해가 홍안을 머금고 해변에 깔린 물빛 위로 내려앉는다. 물빛 위에서 부끄러운지 얼굴이 더욱 붉다. 그 얼굴이 베푼 은총으로 온 대지가 희망으로 물든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희망찬 일기를 쓸 건지 그게 몹시 궁금하다.

 

하긴 누구나 그리 희망찬 기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지도 모를 일. 하루가 다 기울고 나면 그 꿈이 망상인지, 비전인지 판가름 나겠지. 하늘만 물들여도 그 은총이 버거울 텐데. 바다를 물들이고 내 마음까지 물들이고야 만다. 그것이 해의 넉넉함이려니.

 

해가 데리고 놀 하루의 바다, 바닷물, 모래알 그리고 물새떼들과 그 가운데 인간, 다만 인간만이 자신이 해에 물드는 게 아니라 해가 자신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뻐길 뿐. 모두는 해의 은총에 마냥 기댈 뿐이다. 인간의 교만은 해의 용솟음을 보면서도 한 치도 뒤로 물러날 줄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지구는 그 자신만을 위해 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그 자신만을 떠받들어줘야 한다. 인간에게만 이런 어린이다움이 있다. 인간만이 해가 가져다주는 은총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에게 도취된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의 언저리에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헝클어져 사위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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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새로 바다가 던지는 새소리, 파도소리.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해와 바다는 그렇게 만나 오늘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 김학현

새새로 바다가 던지는 새소리, 파도소리.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해와 바다는 그렇게 만나 오늘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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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아니라 산이라 해도 그럴싸한 바위섬. 물 빠진 바위섬에는 불가사리가 웅크리고 똬리를 틀고서 물이 들어오기만 목 놓아 기다린다. ⓒ 김학현

바다가 아니라 산이라 해도 그럴싸한 바위섬. 물 빠진 바위섬에는 불가사리가 웅크리고 똬리를 틀고서 물이 들어오기만 목 놓아 기다린다. ⓒ 김학현

 
철 이른 망대가 오도카니 서서 어쩌다 지나는 길손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아침 바람도 망대 위에서 잠시 쉬어 가는지 망대는 뿌연 연무로 둘러싸여 망중한을 즐긴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외치는 소리, 사람들이 운동을 해야 건강해진다고 호들갑떠는 소리, 새새로 바다가 던지는 새소리, 파도소리.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해와 바다는 그렇게 만나 오늘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첨에는 여기가 바단가 생각했다. 바다가 아니라 산이라 해도 그럴싸한 바위섬,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하고는 좀 다르지만, 물 빠진 바위섬에는 불가사리가 웅크리고 똬리를 틀고서 물이 들어오기만 목 놓아 기다린다. 산이면 어떻고 바다면 어떠하리. 파란색이면 어떻고 물빛이면 어떠하리. 바다를 의지한 생물들이 즐거우면 되지.
 
바닷물이 바위섬과 조우하며 빚어낸 그리움만이 해초들 무더기 사이로 헤집고 들어왔다 나간다. 어느새 초록의 희망섬을 만들고 그들만의 세계를 자랑한다. 아무리 보아도 아무것도 없는데 물새떼들은 마냥 들락거리며 먹이를 사냥한다.
 
밍밍한 이야기는 싫다. 짭쪼름한 맛이어야 한다. 목숨 다해 도망가던 게며 망둥이가 민망한 죽음에 들어설 때도 여전히 바다는 말이 없다. 다만 바닷물들이 아우성치는 응석만 철썩거린다. 물새떼는 생을 위해 싸우고,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바다생물들 또한 생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항상 한편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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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새떼는 생을 위해 싸우고,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바다생물들 또한 생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항상 한편이 이긴다. ⓒ 김학현

물새떼는 생을 위해 싸우고,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바다생물들 또한 생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항상 한편이 이긴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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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비 안에서 무수한 모래알들이 조가비가 꾸는 꿈을 알려준다. 바닷물과 어울린 모래알들, 아마도 자신을 따라 죽음으로 갈 생물들에게 아침밥을 지어주려는 모양이다. ⓒ 김학현

조가비 안에서 무수한 모래알들이 조가비가 꾸는 꿈을 알려준다. 바닷물과 어울린 모래알들, 아마도 자신을 따라 죽음으로 갈 생물들에게 아침밥을 지어주려는 모양이다. ⓒ 김학현

 

모래들과 파도의 아우성 소리에 묻힐 줄 알았던 그들의 싸움은 치열하기 그지없다. 인생도 그 이외의 생물도 진한 싸움 끝에야 삶이란 선물을 얻는 게 분명하다. 물새떼의 승리는 그들에게 쉼을 선물하고 떠난 치열한 전장에서 깃발을 꽂는다.

 

항상 생의 치열한 전쟁만 있는 건 아니다. 이미 삶이나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것도 있다. 발딱 젖혀진 조가비 하나, 이미 생의 전쟁을 마쳤기에(그 전쟁에서 진 게 뻔하지만) 너무나 한가하다. 또 다른 희망을 본다. 또 다른 꿈을 꾼다.

 

조가비 안에서 무수한 모래알들이 조가비가 꾸는 꿈을 알려준다. 바닷물과 어울린 모래알들, 아마도 자신을 따라 죽음으로 갈 생물들에게 아침밥을 지어주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홍안을 내밀며 떠오르는 해에 기대어 밥을 지을 모양이다. 죽었다고, 이젠 끝이라고, 감히 누가 조가비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말을 하랴.

 

긴 줄 하나 끝없이 바다로 향하고, 파래가 붙어 그냥 생명 없는 줄만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 끝에 무엇이 있을까? 부표가 덩그러니 지나는 배에게 길을 가리켜준다. 누구나 이렇게 길을 만들며 간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그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힘겨운 인생사를 백사장 위에 쓴다. 누구나 발자국을 남기며 산다. 처음 가는 길 위에 남은 발자국이든, 이미 간 길 위에 남기는 발자국이든... 나도 살포시 그 곁에 발자국을 찍어본다.

 

이른 아침 대천해수욕장을 걸으며, 그것도 아주 느리게 걸으며, 바다가 남기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참 소중한 추억이다. 빈 조가비도 꿈을 꾸는 바다, 닻줄 하나에도 무수한 꿈을 실어 망망대해로 띄울 수 있는 바다, 빈 것만 같은 인생이라도 작은 꿈 하나 가진다고 나무랄 사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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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줄 하나 끝없이 바다로 향하고, 파래가 붙어 그냥 생명 없는 줄만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 김학현

긴 줄 하나 끝없이 바다로 향하고, 파래가 붙어 그냥 생명 없는 줄만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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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레 위에 찍힌 발자국이 힘겨운 인생사를 백사장 위에 쓴다. ⓒ 김학현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레 위에 찍힌 발자국이 힘겨운 인생사를 백사장 위에 쓴다. ⓒ 김학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당당뉴스,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4.07 20:59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당당뉴스,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천해수욕장 #바다 #백사장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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