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남편 초상 치르는 할머니를 보며

등록 2008.03.11 10:31수정 2008.03.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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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는 제법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몸을 파고드는 한밤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남편 마중도 할 겸 아파트 앞 긴 나무 의자를 찾았다. 이 시간이면 쓸쓸하던 의자에 오늘은 할머니 한 분이 먼저 와 앉아 계셨다.

 

가로등이 있기는 하지만 등나무 아래인지라 서로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는 관계로 간단한 수인사만 나눈 채 말없이 앉아 있는데 초상집에서나 볼 수 있는 차양이 아파트 마당에 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에서 초상을 치르는 것이 생소해서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옆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났나 봐요?”

“예.”

 

‘글쎄요’라든가 ‘그런가 봐요’라는 대답이 아니라 단정적으로 ‘예’라는 대답을 듣자, 나는 혼자 속으로, 할머니와 초상난 댁이 잘 아시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소문을 들어서 아시는 줄 알고 다시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요즘도 아파트에서 초상을 치르는 댁이 있네요. 누가 돌아가셨는데요?”

“저 집 영감이 죽었대요.”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턱으로 초상난 집을 가리키며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하셨다.

 

“영감이 바램이 나서 작은 마누래 해 가지고 30년을 딴 살림 차렸다가 병이 걸렸는데 아들이 그래도 애비라고 데리고 와서 병원에 입원도 시키고 했는데도 죽어 버렸대요."

“어머, 그럼 저 댁에 할머니는 안 계시나 봐요? 할머니가 계시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속상하지도 않아요. 뭔 정이 있어서 속이 상하겠어요.”

“저 댁 할머니랑 잘 아시는 사이세요?”

“내래요.”

“예?”

 

예나 지금이나 잠시 한 눈 파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만은, 남의 말하듯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분이지만 분하고 괘씸해서 한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밖에 나와 계신다 하셨다. 그러면서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멀뚱히 보고 계셨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서 혼잣말을 뇌이셨다.

 

‘젊은 시절 저 잘 났다고 지 맘대로 해 놓고 뭔 염치로 자식을 따라와. 어이구어이구 망할놈의 영감탱이. 죽으면 내가 용서할 줄 알고? 아나 택도 없다. 지가 하나 있는 아들 공부를 시키길 했어 옷을 한 번 사 줘 봤어, 하다못해 눈깔사탕 하나를 사 줘 봤어. 어이구 참참.’

 

할머니의 가슴에는 아직도 삭지 않은 분 덩이가 불을 지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성지합’이라고 했던가. 요즘은 예식장에서 잘 볼 수 없지만, 혼례란 양가 집안이 합친다는 의미를 쓴 글귀를 모든 사람들이 보기 좋은 자리에 세워 두었었다.

 

이렇듯 인륜지대사인 혼례를 치르고 나면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헤어짐이란 상상도 하지 못하고 행복해 하는 신혼 부부, 그들 중 누구 한 사람에게 다른 이성이 생겨서 헤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음이 갈라놓은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 그보다 더한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이고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조차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사람들은 왜 짓는 것일까? 죽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벌 또한 없을 것이다.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헤어지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는 무슨 뾰족한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2008.03.11 10:31 ⓒ 2008 OhmyNews
#부부 #바람 #염치 #용서 받지 못할 죄 #죄의 댓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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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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