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지연 경고 절차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
75세 백발의 변호사는 자신이 '틀렸다'는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독일이 유럽인권재판소 판결로 재판지연보상법(법원조직법 198조, § 198 GVG)을 도입한 2011년으로부터 2년 뒤, 평가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크리스티안 키르히베르크(Prof. Dr. Christian Kirchberg)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행정법 전문 변호사로,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변호사법원 법원장과 독일 연방변호사협회 헌법위원장 및 인권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지연 경고 스티커'의 효과
지난 10월 19일 오후 4시 독일 카를스루에(Karlsruhe)의 변호사 사무실. 퇴근 1시간을 앞둔 사무실은 한산한 분위기였다. 최근 코로나19를 앓았다는 키르히베르크 변호사는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배경과 현황이 가득 담은 사전 자료를 전달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주름진 손에도 법전 두 권과 자료집이 들려있었다. 때때로 책을 열어 재판지연보상법을 한 문장씩 해설하고, 카메라를 든 기자에게 '이 부분을 찍어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법을 소개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3시간에 가까운 인터뷰 동안 한국엔 없는 재판 지연 권리 구제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을 할애했다. 동시에 자성이 뒤따랐다. 자신이 도입 초기 평가 때 '판사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보상 소송 전 지연 경고(Verzögerungsrüge) 절차가 실제 현장에선 취지에 맞게 잘 작동하고 있다는 판단 정정이었다.
키르히베르크 변호사는 "법원 내부에서도 (질책 개념으로 받아들여) 적극 조치를 취했다. 마치 꼬리표가 붙은 것처럼 압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면서 "(재판 당사자의 경고가 수용되면) 기일을 서둘러 잡아주거나, 증거 심의를 빨리 요청하거나, 모든 당사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해 주기도 한다. 조치들이 명문화돼 있지 않음에도, 법원이 먼저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난 10월 24일 만난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 사회법원(Landessozialgericht Berlin-Brandenburg) 37부(재판지연전담재판부) 자비네 유크나트(RnLSG Sabine Jucknat) 판사는 실제 존재하는 '지연 경고 스티커'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지연 경고가 절차에 따라 접수 되면 (사건 서류 위에) 누가 봐도 '경고가 들어 왔네' 의식할 수 있도록 노란 스티커를 붙여 인지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각급 법원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지연 경고는 판사의 충분한 심리 기간을 함께 보장하기 위해 소 제기 후 일정 기간 뒤 제기할 수 있도록 돼있다.
키르히베르크 변호사는 재판 지연 보상의 초점은 돈이 아닌 국가의 권리 구제 노력에 있다고 강조했다. 판사 수 증원을 중심으로 불거지고 있는 한국의 재판지연 논의도 마찬가지 기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보상법 도입에 소 제기가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선을 그었다. 키르히베르크 변호사는 "국가가 (지연 해소를 위해) 더 노력할 일이지, 소송이 늘어날 것을 먼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독일은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또 다른' 지연 구제책을 마련해 오고 있다. 2015년 양육권 관련 법 개정이 대표적이다. 가사사건 및 비송사건 절차법 155b조'(§ 155b FamFG)에 자녀 양육과 관련한 문제의 경우 '빠른 재판'을 우선하라는 조항을 새로 추가한 것. 이 법에 따르면 당사자가 절차 지연 문제를 제기해 받아 들여진다면, 법원은 한 달 내 판단을 내려야 한다.
키르히베르크 변호사는 "(재판 지연 피해 보상은) 개별 법원을 비난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스템 개선을 위해) 책임지고 노력할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래는 키르히베르크 변호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에 따르면, 당사자가 보상 소송을 제기하기 전 법원에 1차로 지연 경고장을 먼저 보내는 절차가 있다. 법원에 대한 재판 지연 문제제기 자체가 불가능한 한국 상황과 전혀 다른 분위기다.
"(법 도입 후 2년 뒤) 평가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는데(기자 주 - 독일 연방의회는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당시 입법 2년 후 평가를 의결했다.), 당시에는 법원과 판사가 지연 경고 절차를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아니었다. (법원이 이 절차를) 진지하게 받아 들였고, 대다수 재판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사실 이 지연 경고 절차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지연 방지 방안을 만들라고) 판결했을 때 직접적인 소송 절차에 들어가기 앞서 간접적으로 (재판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조치가 (재판 지연 해소에) 직접 영향을 발휘했다."
- 경고장을 받으면 판사들은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는 지 궁금하다. 법원은 경고장이 들어오면 어떤 조치를 취하나?
"경고가 수용 되면, 법원과 판사는 일단 질책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스럽게 법원 내부에서도 적극 조치를 취하게 된다. 재판 기일을 잡아주거나, 증거가 부족해 지연되고 있다고 판단되면 증거 심의를 빨리 요청하기도 한다. 원고와 피고 등 모든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해 주는 경우도 있다. 이 조치들은 규정으로 명문화되어 있진 않지만, 법원이 먼저 (지연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모든 법원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반응하나.
"모든 법원에서 동일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경고장이 법원과 판사 앞에 놓이면 '접수됐고, 끝'이 아니라, '지연 꼬리표'처럼 붙어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한다. 지연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경우에는 법원이 설명을 해준다.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사건 당시 집단 소송이 벌어졌을 때나, 코로나19로 행정 절차가 지체됐을 때도 그랬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했나.
"왜 재판이 지연 됐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집단 소송이고, 여론의 관심이 집중돼 있으며, 민감한 사안이므로 충실히 진행해야 한다는 (사법부의) 합의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들을 설명한다.
[보상의 작동] "재판지연보상 도입 10년, 1천 건 보상... 법원이 달라졌다"
- 도입 2년 후 평가 보고서에선 보상법이 실제 재판지연 해소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10년 후 평가가 정반대로 바뀐 셈인데.
"(크게 웃으며) 나는 도입 초기에 지연 경고 절차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줄곧 강조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보니 실제 현장에선 판사들이 정말 (이 절차를)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다. 10년 동안 보상법이 작동하는 과정을 보며 나도 많이 배웠다. 쓸모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지연 경고 절차에 (사법부가) 열심히 대처 하는 모습을 보며 매우 놀랐다."
- 실제 재판지연보상법으로 보상을 받아낸 사례가 많은가.
"지난 10년 간 독일의 모든 법원을 다 합쳐 약 1천 건의 보상이 이뤄졌다. 국가가 보상금을 (지연 피해자에게) 지불한 것이다."
- 우리가 만난 또 다른 독일 법조인은 보상법 도입으로 불필요한 보상 소송 제기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는 우려도 했다.
"국가가 (지연 해소를 위해) 더 노력할 일이지, 소송이 늘어나는 걸 먼저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스바겐 집단 소송 당시에도 워낙 많은 소 제기가 들어와 법무부가 나서서 (지연 해소를) 돕겠다고 결정했다. 각 주 대법원에 추가 부를 설치하는 등 연방 법원을 도울 수 있는 방식 등이 거론됐다. (재판지연보상법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경우, 판사 인력난 해소를 위한 예산안 투입 등을 고민해볼 수 있다. 국가가 지연 구제를 위해 추가로 노력하는 것이다."
- 인터뷰 사전 답변을 통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재판지연 피해가 인정된 사례도 소개했다. 사건배당 과정에 지연이 있었다고 판단, 3천 유로(약 410만 원)를 보상하라고 판결했다는 내용이다.
"(재판부가) 실수로 담당이 아닌 부서에 사건을 배당한 것이 문제가 됐다. (부서끼리) 싸우는 과정에서 지연된 것이다. 1부가 할 거냐, 2부가 할 거냐를 두고 12개월이 걸렸고 이 문제가 인정됐다. 당시 담당 재판관이 법정 출석을 거부하는 등 극렬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 법원에서 '이 정도면 지연됐다'고 보는 판단 기준이 있나.
"(법전을 펼쳐 재판지연보상법 가리켜 읽으며) 절대 기준은 없다. 재판지연보상법의 '과도한 재판 기간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상급법원 등에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법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개별 사건마다 같은 잣대로 지연 여부를 판단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개별 사건마다 '이건 과도한 재판 기간'이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있을 것이다. 다만 (사회보장 정책을 다루는) 사회법원이나, (세금 문제를 다루는) 재정 법원은 예외다."
[보상의 초점] 돈 < 법원의 잘못 '인정'
- 재판이 13년 지연 돼 헌법재판소에 소를 제기한 사례도 언급했는데.
"튀링겐주 헌법재판소에서 다룬 문제다. (하급심에서) 13년째 지연됐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가 재판지연보상법에 따른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서 소송 자체가 기각됐다. 다만 헌법재판소가 기각 결정과 동시에, 당사자에게 지연 해소를 위한 절차를 직접 안내했다. '해당 법원은 빠른 조치를 취해야 마땅하며, 당신이 원한다면 (담당 법원에) 재판지연보상 소송 제기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 재판 지연으로 인한 손실보상금액은 10년 전 제정 당시 책정된 1년당 1200유로(약 165만 원)에서 변동되지 않았다. 이 금액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시도, 지금도 큰 액수는 아니다. (법전 속 내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 법의 목적은 금액 자체가 아니라, 법원이 재판 지연을 인정한다는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금액의 소정의 위로금이다. 당사자에게 돈보다 위로의 의미가 더 크게 작용된다는 뜻이다."
- 인터뷰 사전 답변 자료를 보니, 독일은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이후에도 아동의 법적 구제 조치를 위한 또 다른 지연 해소 절차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어떤 내용인가.
"가족법에서다. 2015년에 추가된 내용이다. 아동 문제의 경우, 빠른 재판을 우선 지향하라는 내용을 명문화한 것이다. 유럽인권재판소가 판결한 내용을 실현한 것인데, 아동 문제는 시간이 특히 중요한 구제 요인이기 때문에 '빠른 재판'을 예외 조항으로 추가했다."
-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나.
"2004년 독일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터키 가족 사례다. 터키계 아버지가 양육권 관련 소송을 냈다. 아이가 다 자라면 재판 결과가 소용없기 때문에 빠른 결론이 필요했다. 그런데 재판이 너무 오래 걸렸고, 당사자가 이 문제를 유럽인권재판소에 제기했다. 그때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10년의 성과와 변화
- 한국에선 재판지연 해결책으로 판사 증원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판사 증원은 필요하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판사 수가 적으면, 구조적 재판 지연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소송이 홍수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만, 모든 해결책은 '충실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돼선 안 된다'는 기준에서 시작해야 한다. 재판지연보상법도 마찬가지다. 개별 법원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스템 개선을 위해) 책임지고 노력할 문제다. 독일 법원들은 10년간 그 문제에 적극 대응해왔다."
- 현직 변호사로 오랜 기간 활동했다. 현장에서 보기에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후 재판지연 문제가 개선됐다고 보는가.
"법 도입 후 10년간 관련 소송을 많이 담당했다. 원고든 피고든 당사자들은 확실히 많이 인식하고 있다. 10년간 1천 건이 보상 조치가 됐다는 통계만 봐도 이 법의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다."
- 한국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헌법에 명문화해 놓고 있으나 이를 토대로 헌법 소원을 하면 각하되는 게 현실이다.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이전에 독일 헌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소했나.
"독일에서도 헌법소원을 내면, 특정 사건만 권리 침해를 인정할 뿐 구제 수단은 마땅히 없었다. 한국의 경우 헌법에 그 권리가 명시돼 있는데 헌재에서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라면... 지금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국회가 재판지연보상법과 같은 법을 입법하거나, 헌재가 의견을 바꾸는 것. 그 외는 방법이 없다."
-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후 10년이 지났다. 독일 법원은 얼마나 변했다고 보나.
"다시 말하지만,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건 (법 도입 후) 사법부가 규칙적, 지속적으로 신속한 재판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보상 받을 조치만 명문화하고, '신속해야 할 의무'는 규정하진 않고 있음에도 (마치 의무를 실현하듯)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평가하고 싶다. 현 상황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칭찬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