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주네의 <하녀들>에서 쏠랑주(배우 이현숙) 착하고, 미소 짓고, 친절하기야 쉽지. 하지만 그건 예쁘고 돈이 많을 때 얘기야. 하녀가 착할 수는 없어.

▲ 장 주네의 <하녀들>에서 쏠랑주(배우 이현숙) 착하고, 미소 짓고, 친절하기야 쉽지. 하지만 그건 예쁘고 돈이 많을 때 얘기야. 하녀가 착할 수는 없어. ⓒ 연극문화공동체DIC

 
프랑스 작가 장 주네는 1933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희곡 한 편을 쓴다. 바로 <하녀들>(1947)이다. 하녀로 일하던 자매가 여주인과 그 딸을 살해한 후 태연하게 잠을 자다가 검거된 사건이었는데, 살해 수법의 잔인함과 사건의 모호성 등으로 당시 프랑스 지성 사회를 발칵 뒤집었다. 봉준호는 <기생충>을 만들면서 이 '파팽 자매 살인 사건'을 재구성한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4월 19일과 20일에 빛고을 광주에 있는 소극장 '공연일번지'에서 이 장 주네의 <하녀들>이 무대에 올랐다. '연극문화공동체 DIC'의 작품이었고, 정문희가 연출을 맡았다. 사실 '연극문화공동체 DIC'의 <하녀들>은 지난 3월 5일부터 3월 9일까지 있었던 '제38회 광주연극제'에서 대상과 연출상을 받았고, 쏠랑주 역의 이현숙은 연기상을 받았다. '연극문화공동체 DIC'의 <하녀들>은 26일과 27일에도 '공연일번지'에서 공연된다.
 
마담의 흉내를 내는 끌레르 난 정말 아름다워. 위험의 후광을 받아서 난 더욱더 빛이 나. 하지만 끌레르 넌......

▲ 마담의 흉내를 내는 끌레르 난 정말 아름다워. 위험의 후광을 받아서 난 더욱더 빛이 나. 하지만 끌레르 넌...... ⓒ 연극문화공동체DIC

 
무대가 시작되면 속옷 차림의 여자와 붉은색 고무 장갑을 끼고 하녀들이 입는 옷차림을 한 여자가 나온다. 하녀의 이름은 끌레르이다. 여주인과 하녀 끌레르는 철저히 지배와 굴종의 관계이다. 하녀 끌레르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주인에게 복종하고, 여주인은 자신의 힘과 권위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여자의 관계가 갑자기 끝이 나면서, 주인 역할을 했던 이가 사실은 진짜 끌레르이며(그러니까 쏠랑주의 동생이자 역시 하녀), 끌레르인 줄 알았던 이는 진짜 끌레르의 언니인 쏠랑주라는 것이 밝혀질 때, 관객은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마담의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끌레르(배우 이효선) 악취 풍기는 내 얼굴을 그대로 비춰주는 이 거울이 지겨워. 언니는 나의 악취야.

▲ 마담의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끌레르(배우 이효선) 악취 풍기는 내 얼굴을 그대로 비춰주는 이 거울이 지겨워. 언니는 나의 악취야. ⓒ 연극문화공동체DIC



     
쏠랑주와 끌레르 예의바른 하녀들은 마담의 몸짓을 흉내내지 않는다고요?

▲ 쏠랑주와 끌레르 예의바른 하녀들은 마담의 몸짓을 흉내내지 않는다고요? ⓒ 연극문화공동체DIC

 


장 주네의 <하녀들>이라는 희곡과 연극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한) 일반관객의 반응에 나는 찬탄의 감정을 느꼈는데, 극 초반에 펼쳐지는 두 하녀의 역할 놀이(극중극)가 관객에게 깔끔하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제 첫 골은 잘 들어갔고, 나머지 후반전에서 무대가 관객을 얼마나 설득하고 공감하게 할지가 관전 포인트였다. <하녀들> 자체가 긴장감 있으며 몰입하게 하는 요소가 강한 작품이긴 하지만, 관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이 누구 하나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무대에 집중하는 모습은 근자에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녀로 일하는 두 자매는 자신들이 모시는 여주인을 동경하고 그녀의 생활을 욕망한다. 구체적으로는 비단 드레스와 레이스, 향수, 에나멜 구두, 분, 매니큐어, 보석, 꽃, 그리고 (거칠고 더럽고 험한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만 얻어지는) 백옥 같은 살결 등으로 표상되는 것들이다. 또한 멋지고 점잖은 신사와의 연애도 포함된다. (거칠고 더럽고 험한 일을 해야 하는) 하녀의 생활은 냄새나고 더럽고 변변한 가구도 없이 텅 빈 다락방과 부엌이라는 공간으로 상징된다. 극 중반부에 등장하는 여주인은 어쩌면 봉준호가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 이런 대사를 한다.
 
"난 하인들이 싫다. 그 천하고 추악한 족속을 싫어한다. 하인들은 인간에 속하지 못한다. 그들은 흘러 다닌다. 그들은 우리의 방과 복도를 흘러 다니는 악취다. 우리에게 스며드는, 우리의 입으로 스며들어 우리를 부패시키는 악취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다 악취만을 풍겨댄다."
  
마담(여주인)과 하녀 끌레르 너희들은 참 좋겠다. 비천한 신분이지만, 대신 불행이란 걸 몰라도 되잖니?

▲ 마담(여주인)과 하녀 끌레르 너희들은 참 좋겠다. 비천한 신분이지만, 대신 불행이란 걸 몰라도 되잖니? ⓒ 연극문화공동체DIC

 
이런 말을 하는 입으로 여주인은 또 자신은 하녀들을 딸처럼 여긴다고 한다. 지배 계급의 이중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찬 지배 계급의 저급한 발화야말로 이 아름다운 세상의 악취 아닐까? 하녀들은 여주인을 죽이기로 한다. 물론 생각만큼 간단하거나 쉽지는 않다. 역할 놀이에서 이미 시도했지만, 환상(극중극) 속에서도 실패한 살인이다. 하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여주인의 애인인 무슈를 거짓 편지로 고발한 끌레르의 짓이 밝혀질 위기에 처한다.

하녀들은 여주인이 자주 마시는 차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타지만, 여주인은 차를 마시지 않고 외출해버린다. 쏠랑주와 끌레르는 환상(극중극)에서 실패했던 여주인 살해를 현실에서도 결국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그 욕망은 너무나 크고 깊은 것이었을까. 자신들을 짓누르는 지배 계급을 죽이고 그 지배 계급의 정체성을 가면처럼이나마 쓰고 싶다는 욕망, 전도(顚倒)된 정체성에의 욕망 말이다. 마담이 차를 마시지 않고 나간 뒤, 두 하녀는 다시 극중극을 시작한다. 끌레르가 다시 마담이 되고, 쏠랑주는 끌레르가 된다.
 
마담의 죽음, 사실은 끌레르의 죽음 현실에서 마담을 살해하는 데 실패한 하녀는 환상 속에서 살인을 실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담 역할을 맡았던 자기 살해가 된다.

▲ 마담의 죽음, 사실은 끌레르의 죽음 현실에서 마담을 살해하는 데 실패한 하녀는 환상 속에서 살인을 실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담 역할을 맡았던 자기 살해가 된다. ⓒ 연극문화공동체DIC

 
마담(끌레르)은 하녀 끌레르(쏠랑주)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치사량의 수면제가 들어 있는 그 차 말이다. 1933년에 파팽 자매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주인을 엽기적으로 살해하는데, 장 주네는 주인 살해를 환상 속에서 실현한다. 쏠랑주와 끌레르는 자신들의 주인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현실에서 죽는 건 하녀 중 동생인 끌레르다. 역할 놀이 내내 마담 역을 했던 끌레르 말이다.
 
  환상 속에서의 살인 역할 놀이를 완수해야만 하는 쏠랑주는 동생(마담)에게 독이 든 차를 준다.

▲ 환상 속에서의 살인 역할 놀이를 완수해야만 하는 쏠랑주는 동생(마담)에게 독이 든 차를 준다. ⓒ 연극문화공동체DIC

 
여주인에게 자꾸 차(독)를 권하는 끌레르와 먹을 듯하면서 마시지 않는 여주인의 밀당을 바라보는 관객이 과연 어느 쪽을 바랐는지 불현듯 궁금하다. 관객은 자신을 어느 쪽에 세워 두었을까? 여주인(지배 계급)이었을까, 아니면 하녀들(피지배 계급)이었을까. 그저 바라보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상관없이 그저 바라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이 어느 쪽에 더 감정이입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관객이 ('연극문화공동체 DIC'가 만든) 장 주네의 <하녀들>이라는 작품에 경도되었다는 것은 무대가 끝난 후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한 관객은 연극이 끝나자마자 '멋지다!'라고 내뱉었고, 다른 관객은 '너무 좋은데!'라고 옆 사람에게 중얼거렸다. 중간중간 지루했고 졸음이 왔다는 관객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하녀들>이라는 무대를 충분히 흡수하고 즐긴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나는 느꼈다).

그런 분위기를 이끈 일차적인 힘은 배우에게 있었다고 본다. 쏠랑주와 끌레르 그리고 마담(여주인)으로 이루어진 세 명의 출연진들은 장 주네의 희곡이 표방하는 바를 정확히 묘사하려 했고, 또 그것을 목표로 했을 연출의 의도대로 온 힘을 다해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세 명의 배우 간에 연기적 격차가 좀 있었고, 호흡과 호흡 간에 더 긴밀한 교환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결론적으로 완벽한 앙상블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내가 느끼는 아쉬움은 일반 관객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에 일단은 꽤 성공적인 무대였다고 본다.

'광주연극제'에서는 이번 '공연일번지'(소극장)보다는 넓은 무대(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공연했고, 그림자라고 불리는 배우 1, 2가 있었다. 그러니까 '연극문화공동체 DIC'는 소극장용으로 대본을 다시 각색해서 연습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런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가진 연극 무대를 보러 발걸음해서 시종일관 진지한 자세로 집중한 관객에게 무엇보다 큰 박수와 감사를 보내고 싶다.
하녀들 장주네 광주연극제 봉준호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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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글쓰기를 사랑하며 평화로운 삶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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