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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배’ 혹은 ‘뻘배’는 갯벌에서 일할 때 쓰는 도구이다. 한 다리는 올려놓고, 한 다리로 뻘을 밀면서 이동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널(배)’이라고 불렀다. 버려진 널배가 벌교의 쇠락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하다.
▲ 개뻘에 버려진 널배 ‘널배’ 혹은 ‘뻘배’는 갯벌에서 일할 때 쓰는 도구이다. 한 다리는 올려놓고, 한 다리로 뻘을 밀면서 이동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널(배)’이라고 불렀다. 버려진 널배가 벌교의 쇠락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하다.
ⓒ 이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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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벌교는 집에서 10리 안팎 거리로써 할머니가 진치재를 넘어 시장에 걸어 가셨다. 할아버지는 여동생을 벌교 소화다리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곤 하셨다. 초등학교 방학 때 나주에 사는 부모님을 만나러 구룡역에서 기차를 타면 첫 정거장이 벌교다. 외서 외갓집을 갈 때 벌교를 지나서 갔다.

이처럼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벌교라는 이름은 벌판의 '벌'과 개펄의 '개'를 따서 벌개라고 했다. 여자만의 바닷물은 벌교 천을 타고 벌교읍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읍 양쪽을 오가는 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다리가 읍 이름이 되었다. 벌교는 지형과 사람들 기질로 인하여 전국적인 상징이 많다.

지형적으로 앞바다 쪽으로는 너른 여자만이 있고, 대표적인 해산물이 벌교 꼬막이다. 가족이 순천에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살짝 데쳐 놓은 꼬막 한 소쿠리를 다 먹는다. '한턱낸다'라는 말도 꼬막 껍데기가 턱 밑에 쌓이도록 낸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뒤로는 보성, 순천과 화순으로 이어지는 너른 벌판이 있어 농산물이 풍족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벌교에서 주먹(힘) 자랑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농수산물이 풍부한 벌교 장이 열리는 날 인근 힘깨나 쓰는 사람이 모여서 힘을 겨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말까지 낙안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다. 임경업 장군이 30대 초반에 낙안군수로 있었고, 훈련받은 장정들의 기질이 내려왔을 것이다.

벌교의 힘은 일제 침략에 강하게 대항했다는 의미도 있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보성과 순천을 중심으로 26회의 전투를 치러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했다. 항일 투쟁이 많이 일어나자,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1908년에 낙안군을 해체하여 낙안면은 순천이 되고, 벌교읍은 보성군이 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도 벌교지역 청년들은 일본인들에 굽히지 않고 싸웠다. 문물이 풍부한 벌교가 탐이 났지만, 일본인이 정착하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웬만해서는 일제와 싸운 이야기를 벌교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뜻도 있다.

항일 투사인 나철 선생은 벌교 태생이다.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 동지들이 붙잡히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단군교(훗날 대종교)를 만들고, 초대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였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북로군정서는 1911년에 조직된 대종교 계통의 항일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이 전신이 되어 발족하였다.

또 벌교는 고흥에서 육지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다. 고흥 사람들, 특히 청해진이 해체되고 도망 온 장사들이 살았다는 거금도는 실제로 레슬링 선수 김일 등 장사들이 많다. 그리고 근대화되면서 순천과 광주 가는 신작로와 철도가 벌교를 지난다. 길목을 지키는 벌교 젊은이들이 텃세를 부리려면 힘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벌교는 힘이 셀뿐 아니라 소설가 조정래, 시인 박노해, 송경동 등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다. 문필봉인 고흥 첨산이 벌교 남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첨산은 고흥반도를 지키는 신비한 산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소설은 꼬막을 성행위로 묘사하여 꼬막이 유명해지는 데 큰 몫을 했다. 벌교와 순천에 걸쳐 있는 제석산은 고향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나는 제석산 자락에서 컸다고 할 수 있다.

벌교는 고려말 잦은 왜구 침략, 지주와 소작농 싸움, 찬탁과 반탁, 단독정부 수립 찬성과 반대에서 시작하여 여순 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마을이다. 어렸을 때 컸던 지형지물을 지금 보면 작게 보이게 마련이지만, 벌교는 정말 작은 마을로 변해 있다. 개펄에 버려진 널배가 벌교의 지역 소멸과 쇠락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태그:#벌교, #꼬막, #태백산맥, #첨산과제석산,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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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해군 제독 정치학 박사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 전)서울시안보정책자문위원 전)합동참모본부발전연구위원 저서<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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