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트에서 열무 두 단을 사고 와서 만든 열무김치
 마트에서 열무 두 단을 사고 와서 만든 열무김치
ⓒ 문수진

관련사진보기


실컷 놀다 '공부 좀 해 볼까?' 하는 순간 엄마가 문을 열고 소리친다. '공부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빠지면서 공부하기 싫어진다. 오십을 바라보고 있지만, 열다섯 살의 내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마트에 갔는데 싱싱한 열무가 있었다. 이걸 사고 가? 말아? 한참을 고민하다 열무김치를 좋아하는 아들 생각에 두 단을 사 왔다. 마침 김장 김치가 떨어져 집을 대충 치우고 열무김치를 만들었다. 사과와 배와 양파를 갈아 넣었다. 만들 때마다 맛이 다른 건 네이버 선생님이 바뀌기 때문이다.

김치를 할 때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부자가 된 것 같고, 뿌듯하다. 김치통에 가득 열무김치를 담고 나니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었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데 앞집에 사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니?"
"아이들 데리러 가는데요"
"열무 해 줄 테니까 김치 해 먹으라."
"어, 어머니는 왜 안 하시고?"
"열무가 연할 때 빨리 해 먹으라이."


언제나처럼 시어머니는 본인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방금 열무김치를 했다는 말을 못 했다. 어머님은 얼마 안 된다고 하지만 어머니의 조금과 내가 생각하는 조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가 보니 성질 급한 어머님은 텃밭에 있는 열무를 씻고 소금에 절인 후에 찹쌀 풀을 쑤고 계셨다. 본인이 만든 김치를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먹을 열무를 심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듯했다.

아무 소리 없이 절여진 열무를 가지고 왔다. 저녁을 해야 하는데 김치가 먼저여서 양해를 구하고 열무김치를 했다. 씻긴 열무를 양념에 무치기만 하는 거라 힘들진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열무김치를 좋아하기 때문에, 김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약간의 고부갈등, 적당한 거리
 
텃밭에서 캔 열무로 만든 열무김치
 텃밭에서 캔 열무로 만든 열무김치
ⓒ 문수진

관련사진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정체가 뭘까. 마트에서 내가 산 열무는 자발적인 소비였고 행동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내켜서 선택한 것이다. 그런 일을 할 때는 힘이 들어도 마음은 가볍다. 찹쌀 풀을 쑤고 과일을 갈면서도 맛있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 이것저것을 더하게 된다

어머니의 열무는 어머니가 소일거리를 위해 씨를 뿌려서 거둔 것이다. 그걸 캐고 씻고 절이는 수고를 해 주셨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은 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팔순의 시어머니는 막내며느리인 내게 한탄한다.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맞춰 살았지만 정작 자식들은 그 공을 몰라줘서 섭섭하다고 하신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의 하소연을 가만히 듣는다. 어머님의 마음도 이해되고, 그걸 못 받아들이는 나를 비롯한 자식들의 심정도 알겠다.

선물은 상대가 받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좋은 것을 주는 것. 내가 아는 선물의 개념이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주는 행위에 만족한다. 본인이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열무만 해도 그렇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앞집에 사는 막내며느리에게 연한 열무김치를 해 주고 싶었다면, 미리 언질을 주셔야 했다.

졸지에 열무김치 두 통이 생겼다. 마트에서 산 열무는 연하고 부드러워서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물김치처럼 만들었다. 더운 날 열무국수를 해 먹을 생각에 침이 고였다. 어머님이 주신 열무는 크고 단단했다. 오래 두고 먹을 심산으로 양념을 많이 해서 무쳤다.

시어머니와 앞뒷집에 산 지 21년 차다. 결혼 초기에는 시어머니에게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세 남매를 낳고 키우는 동안 어머니와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이제는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지를 알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하고 싶은 말의 10분의 1만 하며 살고 있다. 약간의 고부갈등은 그러려니 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태그:#열무김치, #여름김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제주토박이, 세 아이의 엄마지만, 밥하는 것보다 글쓰는 게 더 좋은 불량엄마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