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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휴일,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것이 없나 애꿎은 리모컨을 괴롭히다가 <장송의 프리렌>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게 됐다. 인간과 달리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엘프(프리렌)가 과거 10년간 동고동락하며 마왕을 무찔렀던 동료 용사(힘멜)의 사망 이후 동료들의 제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프리렌의 성격이 여정을 통해 조금씩 변하며 성장한다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주요 포인트다. 프리렌은 인간보다 월등히 오래 살기 때문에(작품 기준 1000살이 넘었다) 마법에만 관심이 있을 뿐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고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하다. 타인과는 거리를 두는 성격인지라 과거 동료 3인과 함께 10년간 여행을 다녔어도 소위 '찐친'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머지 동료들은 프리렌을 홀로 두지 않았다. 특히 대장 역할을 했던 힘멜은 프리렌이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항시 따스한 언행으로 대하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우여곡절 끝에 마왕을 토벌하고 프리렌을 비롯한 4인 파티는 훗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각자의 길을 갔다. 다른 3인은 헤어짐을 아쉬워했으나 프리렌은 별다른 아쉬움 없이 새로운 마법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4명이 다시 만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힘멜이 노환으로 사망하기 전이었다. 그 4명은 과거 마왕토벌 여행을 추억할 겸 힘멜의 마지막 여행을 함께했고, 얼마 후 힘멜은 사망했다.

프리렌은 힘멜의 장례식에 참가한 뒤에야 힘멜의 존재감을 느낀다. 자신이 힘멜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함께한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후회한 프리렌은, 힘멜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사람을 이해하고자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프리렌은 여행을 하며 힘멜에게서 받은 배려, 친절, 격려, 용기를 다시금 기억하며 이전의 무미건조한 성격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웃고 울게 되며 동료애와 감사함을 느낀다.

이렇게 프리렌의 성격이 힘멜에 대한 기억을 매개로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비록 가상의 스토리지만, 내 주변에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며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감명 깊은 작품이다.
 
사건을 접하면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중요성과 존재감을 환기할 수 있었다.
 사건을 접하면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중요성과 존재감을 환기할 수 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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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에서 '혼자'가 되는 상황에서 기인한 정신적 충격

이 작품을 보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한 사건을 마주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의 사건이었다. 회사에서 자체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결론이 잘 나온 사건이었으나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사망 전 일주일부터 사망일까지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트리거가 된 업무 부담 및 스트레스 가중 요인이 확인되지 않는 점이다.

짧은 경험이지만 내가 봤던 사건들을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통상적으로 재해 발생 전 재해자들을 정신적 이상 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었으나 이번 사건은 명확하게 그러한 요인이 드러나지 않았다.

고인이 내몰린 상황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조사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망 전 일주일부터 사망일까지 고인의 행적에 답이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회사에서 고인의 팀원들과의 면담을 주선해줬고, 팀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사망 하루 전에 고인이 충격을 받을 만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고인은 다수의 민원인을 상대해야 하는 업무를 수행했었는데, 고인과 팀원을 장기간 곤란하게 만들었던 민원인이 있었다. 그 민원인이 요구하는 사항은 이미 2022년에 결론이 나온 사항이었으며, 민원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그 사업의 예산 한도를 초과하여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고인은 팀원과 함께 민원인을 응대하고 설득하고자 노력했었다. 고인은 팀원보다 상급자이기는 했으나 서로 의지하고 끌어주며 민원업무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망 하루 전 퇴근 직전에 갑작스럽게 팀원의 전근 인사발령 공문이 게시됐다. 그 팀원의 전근 소식은 공문이 게시되기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당사자인 해당 팀원도 놀랐다. 장기간 동고동락하며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던 동료의 갑작스러운 발령은 고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앞으로는 옆을 지켜주던 동료 없이 역경을 홀로 감당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고인에게 무기력함과 우울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와중에 고인은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한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쏟아지는 업무량을 감당해야만 했고,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물론 단편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고인의 사망은 함께 일했던 동료의 갑작스러운 전근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건을 마주하며 들었던 의문이 풀렸다. 고인의 동료들과 문답을 통해 다시금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중요성과 존재감을 환기할 수 있었다.

간과했다 새삼 느낀, 함께하는 동료의 소중함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지난 직장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장을 무작정 그만두면 경제적으로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퇴사를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친한 동료에게 이야기하며 직장 내 불만 사항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러다 이직을 할 기회가 생겨서 바로잡게 되었고, 신난 마음에 친한 동료에게도 "저 갑니다! 잘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의 동료도 웃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했고, 퇴사 파티도 잘 마치고 나오게 되었다. 해당 동료는 계속 만나면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퇴사하고 조금 지난 뒤 만난 자리에서 "네가 나간 뒤 어려움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사람이 없어져서 힘들었다. 네 빈자리가 크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퇴사한다고 신이 났던 철없던 내 모습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고동락했던, 마음이 맞았던 동료의 부재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괴로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상황이 반대였다면 나에게도 동료의 빈자리는 크게 다가왔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과 최근 수임한 사건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으나, 우연히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함께 하는 동료의 존재감. 당연하지만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박경환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공인노무사입니다. 이 기사는 한노보연의 월간지 <일터> 2월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태그:#노동자자살, #정신건강, #노동자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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