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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퇴한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표방하는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주장성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나 기타 의견이 있다면 편집부로 보내주세요. 시민기자가 아닌 분은 글 하단 '시민기자 가입하기'를 클릭해 시민기자로 가입한 뒤 글을 전송하면 됩니다. [편집자말]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률구조공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불거진 여성비하와 허위 혼인신고, 아들 퇴학 무마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지난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률구조공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불거진 여성비하와 허위 혼인신고, 아들 퇴학 무마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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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교수가 법무부장관 후보직에서 전격 사퇴하였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지난 며칠의 시간은 그에게 참 길고 모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글쓰는 이'로 지칭할 정도로 정체성의 핵이 되었던 자신의 책과 칼럼이 난도질당했고 여성관이 도마에 올랐으며 급기야 가족과 혼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검찰개혁'이란 대의(大義)의 나래를 접어야 했다.

안 교수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나에게도 이 시간은 힘들고 갑갑한 것이었다. <남자란 무엇인가>를 읽어보았고 내가 가진 감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보이지만,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서울대 법대에 법여성학 교육을 열었고 국가인권위원장으로 많은 성차별 사건을 다루었던 분이 아니던가. 그의 개인생활에 오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학과 법학교육에 큰 족적을 남겼고 그것이 앞으로 법무부 장관이 된다면 추진할 개혁에 중요한 큐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공과 사의 여러 층위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주관적으로 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안 교수님의 책에 나타난 '여성관'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안 교수님이 법학에 있어 파이오니어(pioneer, 개척자)이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페미니즘의 동조자이자 우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했을까. 안 교수님의 개인생활의 일은 내가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이 글에서는 안 교수님의 '검증'에서 나타났던 여성과 남성관, 젠더인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사검증에서 젠더인식 나아가 젠더정책에 대해서 제안점을 정리하면서 나 자신의 성찰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안경환, 그가 법학에 남긴 의미

먼저, 많이 나왔던 이야기지만 안 교수님의 젠더인식을 앞의 책 하나로 등치시키거나 축소시켜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그의 도덕성 역시 젠더라는 잣대 하나를 따로 '떼어서' 보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뒤에 나오겠지만, 젠더는 그렇게 '하나의 잣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 한권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걸어온 삶과 활동 속에서 그의 젠더인식을 읽어야 한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도 안경환 교수님이 법학에 남긴 의미는 매우 크다. 그는 법대에서 영미법과 헌법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인권법, 법과 문학과 같은 강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법 해석학이 중심으로 이루는 법학의 헤게모니에 문제제기 하면서 법과 문학, 법과 인권의 역동 속에서 법을 다루는 교육과 연구의 모습을 스스로 그려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법사회학적인 표현대로 하면, 법전 속의 법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삶 속에 실행되는 '살아있는 법'에 근접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법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혁을 위해 노력해 온 분이다. 현재의 법학전문대학원의 제도 설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법학 내부의 전공(헌법, 민형, 형법과 같은)간 장벽을 허물어 소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새로운 사유를 하는 많은 제자를 길어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저술과 번역 작업도 헌법, 영미법을 넘어서서 소수자, 여성, 셰익스피어, 사랑, 인물평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다작(多作)이다. 일찍이 <법은 누구편인가>(러셀 W. 겔로웨이)를 번역할 정도로 '법의 편'을 의식한 드문 법학자라고 나는 평가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가  페미니즘 법학에 대해 관심이 있지 않았나 싶다. 

널리 알려졌듯이, 안경환 교수는 법대 학장 재직 시절 서울대 법대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교수를 임용했다. 그의 정년퇴임 대담에서 보면 1988년 최초의 여성 미연방 대법원의 대법관 샌드라 오코너(Sandra Day O'Connor)가 "당신네 학교에 여교수가 몇 명이냐?"고 물어보아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성교수의 임용을 성 평등뿐 아니라 한국 법학교육의 국제화, 다양화라는 견지에서 바라보았고 10여년이 지나서 법대학장으로서 이런 생각을 용감하게 실천에 옮긴 것이다.

마침, 2002년 당시 법대 학생회에서 여성교수의 임용과 법여성학 강과개설을 자신의 1순위 공약에 놓았던 여성 학생회장이 당선되었고, 이런 공약은 학생들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안경환 학장단은 이듬해 봄, 법여성학 공채공고를 내고 절차를 진행시켜서 여성교수를 임용하였으며, 비슷한 시기 여러 명의 여성교수들을 채용하였다.

이후 안경환 교수는 법대 내부와 법대 동창회에서 '서울대 법대를 망치려고 하는가', '여성이 어떻게 법대 교수가 되느냐' 등의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인식이 바로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침묵하는' 남성연대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런 침묵의 연대를 깨고 실천한 것에서 안 교수님도 스스로 '소수자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젠더인식이 소비되는 방식과 내용의 문제

2000년대 중후반쯤, 아직 여성교수를 한 명도 두지 않았던 다른 법대에서 어떤 남성교수가 여성교수의 임용에 대해 제안을 하자 주변 남성교수들이 '여자가 그리 좋은가, 여자는 집에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 적이 있다. 법학 교수들이 이런 시정잡배와 같은 말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런 언사는 남성들의 머릿속에 여자란 '사사화된' 존재, '사적인' 영역에 머무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시켜 준다. 남성으로서 성평등을 관념적으로 말하는 것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교수는 진보남성으로도 드물게 후자이다.

여성교수들을 채용하여 자기 동료로 맞이하여 목소리를 내게 함으로써 서울대와 법학, 그리고 우리사회의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나는 이렇게 안 교수님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여성관이 잘못이든 아니든 간에 며칠 동안 한 인간이 살아온 삶과 족적을 훼손하는 방식의 '검증'이란 정당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는 전국민을 상대로 하여 고해성사를 하였으니 이제 개인적인 상처는 내려놓았으면 한다.

물론 서울대 법대에 여성교수를 임용한 것이 무에 그리 대수냐고, 그것도 알고 보면 서울대 법대 패권주의의 표현 아니냐고 응수할 수 있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문제제기에 수긍한다. 하지만 이제 법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갈등 해소에 있어서 최전방에 서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지난 3월에 내려진 대통령 탄핵결정이 그것을 단적으로 요약한다.

젠더 이슈에 있어서도 IMF 시절 농협 사내부부 조기퇴직 사건에서 최근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한 KTX 비정규 여승무원 사건까지, 역시 대법원에서 다루어진 연예기획사 대표의 청소년 성폭력 사건, 헌법재판소에서 내려진 낙태죄 합헌 결정, 병역 관련 결정 등 많은 사건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한국인들의 일상적 규범을 형성하고 있다. 아직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젠더평등의 의제는 법조계에 거대한 구조변동을 가져오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변화이다.

2009년 7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이임식 모습.
 2009년 7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이임식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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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에서 내가 답답함을 느낀 또 다른 이유는 젠더인식과 성인식이 소비되는 방식과 내용이었다. 젠더인식이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 성적 주체로서의 남성에 대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사람의 젠더인식이란 성적 취향 문제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젠더란 사회적인 성별을, 사회적으로 지칭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시스템이자 지식과 행위의 코드이자 권력관계이자 담론적 구성물이다. 젠더관계는 일과 가정의 양립, 조직의 운영방식, 교육의 내용과 방식, 성관계와 자녀양육에도 흐르고 설비와 투자, 국방과 재정의 분배와도 깊숙이 관여한다. 그래서 젠더는 사회관계를 보는 하나의 방법론이 된다.

예컨대, 지난겨울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호명할 때, 대부분의 정치담론에서 이들은 시민으로 소환하였지 여성이나 남성으로 소환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언제 왜 '여성'으로 소환되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이 매우 정치적인 분류임을 알 수 있다. 여성으로 부르면서 일정한 역할과 상(像)을 함께 불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젠더는 하나의 영역의 이름이 될지언정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의 이름이 되지 않았다.

이번 검증 사태는 한국사회의 젠더인식이란 그저 남성의 성성과 성적 태도라는 폐쇄회로 속에서 갇힌 채 의미를 생성하였다. 공적·정책적 개념으로서의 젠더인식은 실종되고 그것은 사사화되고 개인의 부/도덕 내지 비리의 잣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담론 정치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과 이론에 있어 전혀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맑시스트가 자본가 개인을 처단하는 것으로 자본주의 체제 변동이 이루어진다고 믿을까. 마찬가지로 여성주의자들은 체계적 수준의 불평등과 배제를 문제시하는 것이지 그것을 어떤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하지 않았다. 안 교수님의 성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은 것은 그를 정치적 반대자로 보는, 일차적으로 야당 측일 것이고 앞서 말한 확장된 젠더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한 기왕의 담론체계에 기댄 것이리라.

이번 안경환 교수 사태는 한국사회의 타자인 '여성'이라는 기호를 활용하면서 다시금 타자화하였다는 점에서 담론정치이자 일종의 젠더정치이다. 앞으로 공직자 검증에 있어서 젠더인식이 기준이 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가 해온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남성정치인들의 '신상털이' 도구나 소재거리로 삼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그 결과, 미운 자는 결국 여성이라는 여성혐오의 무의식·의식층위를 강화시킬 것이다.

침묵의 젠더정치와 공공성의 부재

진보정치의 남성들도 기왕의 젠더인식의 장 속에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대다수 남성연대에서 젠더문제 자체가 사회적인 의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한국의 젠더연구와 젠더정책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안경환 교수 같은 분의 과거행적이 아니라 젠더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침묵의 젠더정치'라는 지배적인 젠더정치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지난 대선 때도 여러 차례 TV토론과 공개토론이 이루어졌지만 젠더의제는 정책으로서의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

이는 젠더정책이란 시민들의 삶과 다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중요하고도 넓은 의제라고는 보지 않는다는 정치계의 인식을 반영한다. 그보다는 '돼지 발정제' 류의 개인의 도덕성 혹은 가십으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나 같은 젠더연구자에게 페미니즘은 세계를 보는 사상체계요, 정치운동이요, 역사를 읽고 재해석하는 방법론이자 묻힌 우리 어머니들의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이다.

사실 정책은 담론정치의 산물이며, 다양한 행위자들의 의미를 둘러싼 투쟁의 산물이다. 그리고 또한 항상 의식적인 것은 아니며, 깊은 문화적 의미와 구조를 반영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마경희 박사의 표현). 이런 진단에 젠더정책만큼 적합한 정책영역이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이른바 젠더인식은 우리사회 지배담론의 권력을, 그 모순과 문제점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진보정치의 남성과 여성 간에 연결고리(linkage) 만들기

끝으로 진보정치그룹에게 진보정치의 남성과 여성간의 연결고리의 구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사실, 안 교수님은 누구보다도 새로운 젠더 및 법 정책을 도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충분히 그러하지 못했음이 그의 저술에서 드러난다.

즉, 안 교수님과 젠더연구는 제대로 접촉하지 못했던 상태였고 그럼에도 그는 젠더에 대한 책을 썼다. 이런 접촉면의 부실은 사회적으로 보면 진보남성 학자-정치인들과 페미니스트들 학자-정치인들간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서로가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한다면 페미니스트의 공공정책 역시 폐쇄회로 속에 갇혀버릴 위험성도 있다.

이번 검증 사태에서 진보적 남성정치인들과 여성주의가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연대하고 만나야할지가 과제로 드러났다고 분석한다. 물론 그동안 양자들은 만나고 대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힘이 많이 불균등할 때, 말은 잘 들리지 않는 법. 아직 우리 사회의 남성 권력자들은 여성 그리고 여성주의자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새 정부의 진보적 정치인들은 젠더 정책가들을 할당제의 인식 속에서 집어넣을 일이 아니라 그들과 진정으로 '협치하고' 젠더의제를 공공적인 차원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지 몇몇 우두머리가 아니라 국가행정의 모든 분야 그리고 모든 층위에 젠더 마인드를 가진 분들을 포진하고 독려할 일이며, 이들과 또 이들 간에 종횡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갈 때, 보수정치와 확실히 다른 정치 의제를 발굴하고 실행할 수 있고, 새로운 주체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그림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존 정치와는 게임도 안 되는 버전이 될 것이다. 진보정치의 개혁은 이렇게 전면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태그:#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 #양현아, #서울대 법대,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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