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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석 같은 훈남 동창이 없을 때 생기는 일

[TV 리뷰] JTBC <닥터슬럼프>로 본 진짜 슬럼프

24.03.18 11:35최종업데이트24.03.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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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슬럼프 제목과 배경은 식상한데 소재는 신선했다. 마취과와 성형외과? ⓒ jtbc

 
의사로 시끄러운 이때, <닥터 슬럼프>라는 드라마를 발견했다. 제목 그대로 '의사'가 '슬럼프'에 빠졌다는, 직관적 제목이다. 남자 주인공(박형석 분, 여정우)은 성형외과, 여자 주인공(박신혜 분, 남하늘)은 마취과 의사다. 그 많은 병원 드라마 중 성형외과와 마취과는 내 기억에 처음이라 신선했다. 
 
현실은 모르겠으나 드라마 속 '닥터'의 '슬럼프'는 대부분 환자의 죽음에서 온다. 성형외과나 마취과는 다른 과에 비해 그럴 확률이 낮을 텐데 왜 슬럼프를 내세웠을까. 나같은 시청자를 예상했는지 초반부터 덩치 큰 슬럼프를 배치한다. 여정우는 의료사고로 100억 채무자가 됐고 남하늘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후 번아웃과 우울증 진단을 받고 병원을 관둔다. 여정우 100억에 비해 남하늘 우울증은 얼핏 별 거 아니게 보였지만 남하늘 대사를 통해 한국인 공통의 슬럼프를 본다.  

"행복도 미뤘어. 교수가 되면 맛있는 것도 더 맛있겠지. 교수가 돼서 해외여행 가면 더 재밌겠지. 그렇게 모든 걸 다 내일로 미룬 채 일만 했다고. 실컷 일하고 얻은 게 우울증이야."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크 맨슨은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단점인 물질주의와 돈에 대한 집착을 강조하는 바람에 자본주의의 장점인 자기표현과 개인주의가 무시됐다고 한다. 딱 남하늘 서사다. 남하늘은 의대교수가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몰아부쳤다. 결과는 교수 대신 번아웃과 우울증이었다.

담당 교수가 수시로 인격모독을 하고 논문을 가로채도 그저 참던 남하늘은 수술실 실수까지 본인에게 덮어 씌우려는 행패에 상사 조인트를 걷어차고 사표를 던진다. 
 

▲ 병원에서 까이는 남하늘 나보다 실력없는 상사에게 맨날 당해야 하는 일상 ⓒ jtbc

 
빠른 전개를 선호하는 드라마 문법에 맞게 남하늘의 시원한 반격은 통쾌하긴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저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들 꾸역꾸역 버티고 있으니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평을 받는 게 아닐까.

위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장점인 자기표현과 개인주의를 삶에 제대로 안착시키려면 나의 감정상태를 느끼고 조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저 쓰레기 상사가 오늘도 날 괴롭히네. 기분 나쁘니 술이나 먹고 자자.는 정서 인식 실패이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인이 따르는 패턴이기도 하다.

반면 '논문을 뺏고 책임을 뒤짚어 씌우는 건 그 사람 잘못이야. 이 안에서 계속 이용당하느라 번아웃까지 왔어. 일을 그만두고 나를 먼저 지키자'라고 하는 건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내게 필요한 걸 적절히 찾는 모습이다. 드라마를 이렇게 쓸 수 없으니 극적인 연출을 넣었겠지만 사고 흐름 자체는 이런 맥락일 것이다.

여정우는 그렇게 사표를 쓴 남하늘에게 힘내라는 말 대신 계속 쓰러져 있으라고 한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말 같지만 '가장 우울한 나라'를 벗을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감정을 느껴도 된다는 걸 허락하기 때문이다. 
 

▲ 떡볶이에 행복한 남하늘과 여정우 일만 알던 남하늘에게 일 밖의 작은 행복을 보여주는 여정우 ⓒ jtbc

 
부끄럽고, 실패자 같고, 속상하고, 쿨하지 못한데 쿨한 척 툭툭 털고 힘내서 일어나는 건 내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를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인은 유독 부정적 감정이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여겨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를 비난하기도 한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감정 자체는 우열이 없다.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을 무턱대고 내쫓을 일이 아니라 관심과 돌봄을 내어줘야 한다. 내가 아끼는 다른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 그 마음을 알아주고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일, 그 흔한 일을 나에게 해주는 것이 감정을 허락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방법을 모르는 남하늘을 위해 여정우는 세심한 안내자가 되어줬고 남하늘은 그 안내에 따라 서서히 자신을 회복한다. 여정우 역시 남하늘의 도움으로 슬럼프를 극복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100억 채무자가 되거나 상사를 들이받고 사표 쓰면 현실에서는 끝장이야!'라고 할 수도 있다. 혹자는 주인공 비주얼이 개연성인 로맨스 드라마에 과몰입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내게 우울증이 온다 한들 여정우 같은 훈남 동창생이 나를 다독여주다가 연인이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맞는 말이 모두 도움되는 말은 아니다'를 떠올리며 다시 드라마를 본다.

판타지는 영상이 플레이 될 동안만 즐기고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취하면 그만이다. 훈남 동창이 없는 대신 내가 나를 다독이는 일을 따라해본다. 맞는 말보다 도움되는 말을 내 삶에 가져오는 것, 그게 드라마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소득 아닐까. 
덧붙이는 글 개인 SNS에도 올라갑니다
닥터슬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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