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가 부흥을 맞은 지 10여년 만에 휘청하고 있는 사이, 영화 한 편이 여름 시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디워>를 두고 많은 담론들이 있어왔지만, 하고 많은 논의 중에 빠트린 부분이 있어, 이참에 짚고 넘어 가고자 한다.

<디워>에 대한 찬사는 차치 하고, 우선 비판의 논거들을 살펴보자. 어느 논객은 <디워>에서 네 가지 코드를 찾아내었다. 애국코드(한국 영화의 허리우드 점령), 민족코드(한국적 모티프), 시장 코드(CG기술의 국산화), 그리고 감독의 인생극장 등이다. 이들 중에 세 번째 CG 기술은 인정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혹자는 영화말미의 아리랑 선율과 심형래 감독의 에필로그가 영화를 봐달라고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패자에 대한 애착이 있어, 꼴찌 인생이던 심형래가 일등을 했으니 장하고 대견스러워 영화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극장으로 달려 간다는 것이다.

심형래는 TV에서 바보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약자로 인식됐고,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으며, 심형래 감독은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한 술 더 떠 한국의 관객 대중이 영화산업의 주류에서 밀려 났다는 피해의식이 있다고 한다. 한국영화를 사랑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해준 관객인데, 평론가와 영화 담당 기자들에 의해 무식한 대중으로 취급돼버려 그 반감으로 <디워>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700만 명을 넘긴 관객이 말해주듯 자신들의 정서적 취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욕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논객은 <디워>를 본 관객 집단이 암묵적 좌절감을 공유하는 듯하다면서, <디워>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망하면 안 된다는 식의 괴상한 논리와 정서를 퍼트리며 심형래 감독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가 되었다고 한다.

대강 이상의 것들이 필자가 수집한(주로 한국일보 기사) <디워>에 대한 평가와 이를 본 관객들에 대한 논점이다. 정리하면 같잖은 영화에 엄청난 관객이 몰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스럽거나 당황하는 분위기다. 좀 심하게 말하면, 평론가들이 아니라고 한 영화를 보겠다고 달려드는 관객들은 평론가들에 대한 반발로, 동지적 꼴찌인 심형래의 인간승리에 감동 먹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당했던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이 집단적으로 평론가를 매도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일부 평론가들이 영화 관객을 이토록 모독하는 것 또한 분명히 그릇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디워>가 많은 문제점(극복해야 할 영화적 요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적시한 평론가들의 견해도 옳다. 반면에 장점(일부 네티즌들이 열광할만한 요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디워>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고 적극 옹호한다 해서 그들을 애국 내지 민족 지상주의자로 볼 것도 아니다.

관객은 잘못이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할 만한 자기비용(7000원)을 들여, 스스로 2시간여를 할애하여 소비하고, 자기 발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어느 것도 강제 한 것이 없다. 소위 무슨 무슨 마케팅에 영향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7000원을 강탈하고, 껌껌한 극장에 감금 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능동적 주체였던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역시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여기서 우리는 평론가의 시각이 아닌 관객의 시각에서 그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영화는 영화이다. 이 말은 영화를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드러난 그대로 평가해야 되며, 이를 본 관객 역시 한 편의 보고 싶은 영화를 보았다는 견지에서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영화 한 편 만드는데 엄청난 이데올로기나 숨은 주장주의를 내포하지 않으며, 관객 역시 영화 한 편 보는데 대단한 지적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시 영화 한 편에 숨은 이데올로기가 있다 한들 그것이 관객에게 전달될 확률은 미약하며, 드러내 놓고 이데올로기를 떠들어 댄다고 해서 그것에 영향 받을 관객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평자가 지적했듯이 관객은 더 이상 수동적 입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는 생래적으로 복잡한 성격을 띠고 태어났으며, 여타 예술품과 달리 소비자 즉, 관객과 떼어서는 존재가치가 떨어지는 대상물이다. 따라서 <디워>에 대한 논쟁이 영화 자체 뿐 아니라, 그 것을 본 관객들이 어떻게 700만 명을 넘어가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논지이다.

필자는 여기서 <디워>에 대한 혹평이나 찬평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것은 바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간과되어온 관객을 제대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텍스트 자체(영화 자체)의 분석 및 평가도 중요하지만, 영화는 순수예술 작품과는 달리 매스커뮤니케이션적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래야만 관객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영화를 본 700만의 관객들은 어떤 동기에서 <디워>를 봤을까? 그들은 어느 평자가 영화에서 찾아낸 네 가지 코드 중 어느 코드에 맞춰 영화를 본 것일까? 버려야 할 세 가지 코드에 맞춘 관객들이라 해서 값싼 애국심과 민족 코드로 영화를 감상했기 때문에, 역시 영화의 아름다움도 모르고 극장으로 몰려든 군중이라고 한다면 억측이라고 할 것이다. 혹여 우수한 CG기술을 감상하려 한 관객은 그나마 본전은 찾았지만, 가엾기 짝이 없는 관객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디워>에 내재해 있는 코드가 이것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디워>에서 찾아낸 네 가지 코드가 누구를 위한 코드였단 말인가? 그 코드들의 효용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물론 평자가 찾아낸 이들 코드가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사실 또한 맞다. 그러나 이렇게 찾아낸 코드로 관객들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코드들은 평자들이 평자의 눈으로 찾아낸 코드이고, 평론을 위해서만 가치가 있을 따름이다. 관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코드는 관객의 눈으로 바라볼 때 보이기 마련이며, 그렇게 찾아낸 코드야 말로 관객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관객들에게서는 특기할 만한 유형이 존재하였다. 영화를 보러가는 무수한 동기들을 크게 네 가지로 유형화 해본 결과 ‘오락지향형’ ‘분석취향형’ ‘환상추구형’ ‘감정고양형’ 등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분석취향형’이다. 이 유형은 영화에 대한 높은 안목과 깊은 통찰을 하고 있는 소위 영화에 관한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특정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많이 보고 있으며, 타 유형에 비해 특히 우리 영화를 많이 관람하며, 신문기사, 영화평의 영향을 가장 받지 않는 유형이다. 이들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영화관을 찾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분석하고 나름대로 평가하기 좋아하며, 특히 일부는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하는 부류이다.

이들 분석취향형의 관객들이 바로 영상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이며, 우리 영상 산업의 발전을 이끌고 받쳐주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집단이다. 필자가 이 유형을 찾아낸 때는 2001년으로 당시는 IMF이후 우리 사회가 어려운 시기였으며, 반대로 우리 영화는 발전을 거듭하던 때이다. 이들 유형이 7년이 지난 오늘날 집단화 된 것이며, 인터넷의 발달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심형래 감독이 충무로의 이단아라든가, 왕따라는 것은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다. 관점 차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기존의 충무로 세대가 하지 못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한편으로는 바보스럽게 추구해 왔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바보 ‘영구’로 시작한 그의 영화 인생에 우스꽝스런 괴물이 등장하더니, ‘티라노’에서 공룡스러워지고, 급기야 ‘용가리’라는 괴물로 등장할 때, 충무로 일부의 시각은 필패를 예견하는 데서 나아가 ‘사기’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하며 승승장구하던 심형래 감독은 흥행 참패와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7년 만에 블록버스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기존의 시각이 바뀌었겠는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뚜껑을 여니 ‘엉망진창’이다. 혹시나 했던 시선은 역시나로 바뀌었고, 심형래 감독의 바보스런 영화 행각은 도마에 올려져 난도질당할 찰나, 이게 웬일인가. 네티즌들이 달려들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공교롭게도 ‘분석취향형’ 또는 영화스터디 유형을 구성하는 대표적 관객들은 심형래 감독 인생유전의 시기와 성장을 같이 한다. 심형래 감독이 브라운관에서 바보짓을 할 때 유아기를 보냈으며, 영구시리즈를 만들 때 청소년기를 보낸 ‘용가리’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를 스터디하고 분석하며 나름대로 평가하는 이들이 평자들의 혹평에 반기를 들었으며 논쟁에 불을 붙였다. 논쟁은 논쟁을 낳고 급기야 매스미디어가 가세하면서 거대 담론이 형성되었고, <디워>는 저절로 홍보를 하게 되었다. 이제는 분석취향형 뿐 아니라, 오락지향형의 사람들과 심형래 감독을 무시하던 사람들, 논쟁에 관심 없던 사람들, 심지어 별로 영화를 보지 않던 사람들까지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길래 난리들인가?’ 궁금해서 <디워>를 보러 간다.

일부 평자들이 걱정하듯이 우리 관객들이 형편없는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해서 ‘꼭지 돌 일’도 아니고 창피할 것도 아니다. 우리 관객들은 현명하기 때문에 본 영화를 무조건 치켜세우거나 깎아 내리지도 않는다.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다. 혹자는 평자들의 시각에 점수를 줄 것이고, 혹자는 <디워>가 이룩한 것에 점수를 줄 것이다. 결코 일부 평자나 네티즌들의 의견에 맹목적 동조를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디워>가 다음 달 미국 1500개 극장에서 개봉된다고 한다. 이쯤에서 심형래 감독은 평자들의 지적에 한 번쯤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전체적 플롯과 스토리는 바꿀 수 없다하더라도 이미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성공하였으니, 미국판 버전을 만들었으면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소위 애국 코드 ‘아리랑’ 장면은 괜찮다고 본다. 우리에게나 애국코드이지 미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용이 되어 승천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 가락은 적절한 선곡이라고 본다. 다만 가락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지는 감독의 에필로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디워>가 우리 영화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관객 수도 탄력을 받아 1000만 명을 넘어설지, 아니면 문턱에서 머무를지 모른다. 1000만 명을 넘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이 있다. 우리 영화계에서 40~50대 아저씨 특히 아줌마 세대들이 움직여 주어야 한다.

과연 <디워>가 이들을 극장으로 유인할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디워>는 어린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고개 숙인 사오정 세대가 심형래 감독의 인생극장에 감동한다면 충분히 1000만 명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이점에서 심형래 감독의 모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형래 감독 말대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흥행하는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기 위해서는,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연출과 연기, 충실한 플롯과 대본에 기초하지 않는 영화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심형래 감독의 영화가 점점 나아지고 있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영리한 관객이 언제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줄 아량이 있을지는 모르겠기 때문이다. 명심 할 것은 영화 관람행위는 놀이(play)이지, 과업(work)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2007-08-25 09:57 ⓒ 2007 OhmyNews
디워 심형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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