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8 06:57최종 업데이트 24.05.08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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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형제>의 한 장면 ⓒ ZINC


엄마에게 버려진 4살, 6살 형제가 7년간 숲속에서 살아남은 이야기가 프랑스 사회에 충격과 감동을 전하고 있다. 산속에 버려진 후 동물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 아이가 뒤늦게 인간 세계에 돌아와 적응에 실패하는 이야기를 우린 종종 들어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 밖에서 결코 인간의 특질을 발현시킬 수 없음을 입증하던 과거 사례와 달리 파트리스(형)와 미셸(동생)은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둘만의 단출한 공동체를 이루며 직관과 본능, 서로를 향한 사랑에 의지하여 자립적 삶을 7년간 영위해 왔다는 점과 사회로 돌아온 후 성공적인 삶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1949~1956년에 있었던 이들의 모험담이 오늘에야 알려지게 된 것은 동생 미셸의 증언을 토대로 두 아이의 이야기를 재현한 영화 <형제>(frères, 올리비에 아사스 감독)가 최근 프랑스에서 개봉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형제는 두 사람이 겪은 이야기를 비밀로 간직해 왔던 것이다.

자연으로 탈출하다
 

버려지기 전 찍은 미셸과 파트리스의 유일한 어린 시절 사진 ⓒ ZINC

 
1949년, 두 소년은 프랑스 남서부 라로셸 근처에 있는 한 여름방학 캠프에 맡겨졌다. 방학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은 부모들과 함께 집으로 떠났지만, 그들의 엄마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일간지 신문기자로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던 형제의 엄마는 혼외 연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찾으러 가는 대신 아르헨티나로 취재를 떠났고 다시는 그들을 찾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한동안 그곳에 남겨졌고, 캠프를 운영하던 가정의 하녀가 그들을 돌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아이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캠프 가정의 남편이 목을 매 숨져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형인 파트리스는 동아줄을 칼로 끊어 남자를 구하려 애써 보지만, 죽은 남자의 시체가 떨어지며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였다. 심각한 사태에 휘말렸다 느낀 두 아이는 책임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 숲으로 달아났다. 그날 이후, 이들은 철저히 세상과 단절한 채, 숲속의 일원이 되어 그 속에서 살아간다.

어린 자식에게 사랑을 준 적이 없고 끝내 그들을 버린 엄마, 남편의 눈을 피해 바람을 피운 안주인, 절망해 목숨을 끊은 남자... 그들이 목격한 어른의 세계에선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숲속 첫날 밤은 가시덤불 아래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부터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먹이를 구하고 몸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숲속 생활의 '두려움'은 사흘이 지나자 사라졌다. 두려움 또한 비교 대상이 있어야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미셸은 말했다. 짧은 인생 경험을 가진 그들에겐 그저 살아내야 할 내일이 있을 뿐이었다. 누구의 구조도 도움도 기다리지 않았고, 온전히 스스로 생존해야 함을 절실히 자각했다. 날마다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안전하게 몸을 누일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불 지피는 방법을 터득했고 뛰어난 사냥꾼이 되어갔다. 원할 때마다 토끼와 물고기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형은 늘 먹을 것과 필요한 도구들을 구해왔고, 동생은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고, 옷을 짓고, 오두막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매번 다시 만날 때마다, 미셸은 파트리스가 구해온 것에 열광했고, 파트리스는 미셸이 만들어낸 것에 감탄했다.

비가 새지 않게 하기 위해 지붕 위에 두툼한 이끼를 덮어 시간이 갈수록 더 견고해지는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먹을 수 있는 버섯과 열매를 식별하게 되었고, 칼이며 새총, 바늘 같은 도구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종종 인근 마을에 내려가 닭장의 달걀을 훔치기도 했고, 밭에 심어진 야채, 과일들을 서리하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며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이 숲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전쟁 직후였던 터라 100만 명 넘는 고아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그들이 마을 사람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형제가 숲속에서 지내는 동안, 처음으로 접촉했던 사람은 집시 아이들이었다. 무리를 지어 방랑생활을 하는 집시 아이들과 마주친 형제는 금세 친해졌고 그들의 만찬에 초대되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밤새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여흥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훈훈하게 감싸는 가족,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아이들, 그들이 알지 못했던 인생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집시 여인이 그들을 품에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밤이 지나고, 집시들은 형제에게 함께 떠날 것을 제안했지만 형은 거절했다. 그들에게 가족은 두 사람이었고, 둘의 공동체, 둘만의 사회로 충만했다. 집시의 삶은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배고픔에 시달린 기억은 없었다. 먹을 것은 언제나 찾아 나서면 구해졌다. 겨울 추위는 그들을 괴롭히는 가장 잔인한 적이었지만, 미셸은 두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나무에 오르고, 냇가에서 멱을 감고, 밀밭을 뛰어다니며, 자고 싶을 때 자고, 자연 속의 모든 것, 인간이 버린 것을 도구 삼아 무엇이든 만들며 살아가는 극한의 자유를 누린 마법 같은 시간을 누렸던 것이다.

낙원에서 지옥으로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바와는 반대로, 그들의 낙원은 1956년 다시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종말을 맞는다. 인근 해안에서 종종 수영을 즐기던 형제에게 친절을 베풀던 굴 양식업자가 있었다. 그는 궤짝으로 배를 만들려 애쓰는 형제에게 다가와 조언을 하기도 하고, 도구를 제공하기도 하며, 여느 어른들과는 다른 순수한 호의를 보여준다. 형제는 그에게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가 제안하는 대로 굴 양식 일을 도와 푼돈을 벌기 시작한 것이 7년째 되는 해에 생겨난 변화였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외할머니가 7년 전 사라진 두 손자를 알아보았고, 그 아이들을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아동 유기로 신고하겠노라 협박한 결과, 어머니는 곤란한 상황을 피하고자 그들을 차에 태워 파리로 데려갔다.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린 후였던 그녀는 두 아들을 1년간 위탁 시설에 보내, 학교로 돌아가기 전 사회화의 시간을 갖게 했다.

두 소년이 함께 있으면 못 할 일 없이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시설에선 둘을 언제나 분리시켜 생활하게 만들었고, 산책을 시킬 땐 체인을 매달아 달아나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걷게 했다. 이후 학교에 보내졌지만, 극한의 자유를 누렸던 그들에게 학교의 불합리하고 불의한 규율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학교의 폭거에 온몸으로 항의했고, 문제를 일으켰으며, 퇴학당했다. 결국, 둘은 서로 다른 도시, 다른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거기서도 둘은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했고, 우리에 갇힌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서로를 향해 달려가길 거듭했다.  

서로의 전부이던 존재와 생이별한 채, 모든 자유를 차압당한 그들이 맞은 새로운 인생은 지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결국 둘은 각자의 자질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직업을 찾아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파트리스는 의대에 가서 병원 전체를 책임지는 디렉터가 되었고, 동생 미셸은 파리의 저명한 건축가가 되었다.

언제나 동생의 안위를 살피고 돌보던 형은 타인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이, 형이 구해온 잡동사니들로 네 살 때부터 오두막을 짓고 도구를 만들어내던 동생은 집을 짓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들이 자연 속에서 보낸 7년의 세월은 누구보다 뛰어난 의사와 건축가로서의 자질을 그들에게 키워주었던 것이다.

인생을 거꾸로 시작했다
 

건축가인 미셸 드 로베르가 어린 시절 숲에서 형과 함께 생활하며 지었던 여러가지 형태의 오두막 스케치 ⓒ BRUT 영상 갈무리

 
열정적 의사로, 한 사람의 남자로 생을 불사르듯 살아가던 형 파트리스는 49세가 되던 1993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한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더 이상 이 공허를 채울 수가 없어. 다시는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그 행복을 찾을 수 없어. 우린 인생을 거꾸로 시작했어."

둘은 종종 어린 날 그 시절처럼 함께 야생의 자연으로 떠나는 것을 꿈꾸곤 했지만, 실현하진 못했다. 둘에겐 각자 지켜야 할 가정이, 특히, 미셸에겐 삶의 새로운 연장을 의미하는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7년 동안 굶주리지 않았지만 고른 영양을 섭취할 순 없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특별히 아픈 적도 없었고, 상처가 나면 자연 속에서 치료제를 찾아 자가 치료를 했지만, 거칠었던 야생에서 파트리스는 영양의 불균형을 갖게 된다. 그것이 동생과 달리 파트리스는 자식을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을 제공했다. 미셸에겐 엄마이자 아빠이며 형인 파트리스가 있었지만, 파트리스는 보호해야 할 동생이 있었을 뿐이기에, 7년이란 시간의 무게는 온전히 그의 어깨에 놓여있었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형은 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미셸은 말한다.

형의 죽음 이후, 미셸은 둘만이 간직하던 어린 시절의 비밀을 가족에게 털어 놓았고, 2015년 지인이자 영화감독이던 올라비아 아사스에게 자신의 특별했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았다. 이후 수년간 두 사람은 줄기차게 만나며 영화를 위해 대화한다. 수십 개의 녹취록이 감독에 의해 시나리오로 완성된 날, 미셸은 마치 숲속에 3명의 소년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재현된 자신의 이야기를 그 속에서 발견한다.

영화의 첫 시사를 마친 직후, 미셸에게 떠오른 한 가지 말은 '사랑'이었다고 한다. 서로를 향한 절대적 사랑이 그들을 살게 했고, 성장하게 했으며, 고통스러울 수 있던 시기를 낙원으로 여기게 했다. 형이 준 큰 사랑에 바치고자 미셸은 올리비에 아사스와의 영화작업에 기꺼이 함께했노라고 증언한다.
 

두 사람은 숲에서 살던 7년간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었다고 회고하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 미셸 드 로베르 ⓒ BRUT 영상 갈무리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건축가 미셸 드 로베르의 인터뷰가 거의 모든 프랑스 언론의 지면을 장식하면서 영화 <형제>는 프랑스 사회에 적잖은 질문과 파장을 던지는 중이다. 

전쟁 직후, 온 나라를 떠돌던 100만 명 넘던 고아들은 어떻게 그 시절을 살아냈는지를 되묻고, 다시 사회로 복귀한 그들에게 족쇄처럼 내려진 쇠고랑이 얼마나 야만적인 것인지, 교육이란 이름의 무자비한 제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과연 오늘의 프랑스 사회는 그 시절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도. 

겨우내 내리던 찬비가 그치고, 마침내 파리에도 따스한 햇살과 함께 봄이 찾아오자, 정원의 무화과나무 위에, 열심히 둥지를 짓고 있는 어치새 커플을 지켜볼 수 있었다. 비와 추위를 피하여 새끼를 낳고, 키울 수 있는 보금자리를 스스로 짓고, 먹이를 구하는 모습을 보며 철저히 분업화된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인간 개개인의 능력은 자연에 내던져졌을 때, 저 새들만큼이라도 될지 의심한 적이 있다.  

4살에 자연 속에 던져져도, 인간은 불과 수년 만에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더 안전하고 튼튼하며 따뜻한 주거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영민하게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이들의 이야기는 일깨워 준다. 한 푼의 자본 없이도 두 사람이 7년 동안 극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려준다.  

물론 거기엔 두 가지 중요한 단서가 있다. 단 두 사람일지라도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복수의 인간일 것, 그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신뢰하며 사랑을 나누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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